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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rs of the Elect

Tears of the Elect

Bright-Harbor

9월 7, 2026 by K. Blackthorn

마을에 들어서자 아름은 시커의 손을 조용히 놓고 그의 앞에 섰다. “시커.”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어둠의 땅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모두 잊어버려요. 선원들, 술집, 창녀촌… 여긴 밝은항이에요.”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덧붙였다. “여기서는 제 손을 잡으면 안 돼요. 그리고…” 그녀가 얼른 말을 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키스도 안 돼요.”

“여긴 모두가 서로를 아는 마을이에요. 소문도 정말 빨리 퍼지고요. 우린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벌써 다들 이야기하고 있을 거예요. 난 당신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시커. 그냥… 여긴 원래 그래요.”

시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은 바닷가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파도가 모래사장을 부드럽게 적셨고, 짙은 소금 냄새가 공기 가득 배어 있었다. 해안을 따라 늘어선 등불들이 바다를 은은하게 비추며, 어둠 속에서 작은 고깃배들이 물결에 흔들리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집들은 모두 아담했다. 세로로 세운 널빤지로 벽을 만들고 나무 너와지붕을 얹은 집들이었다. 집마다 작은 마당이 있었고, 어떤 곳에는 채소밭이, 어떤 곳에는 빨랫줄이, 또 어떤 곳에는 장대를 세워 그물들을 널어 두었다. 허리 높이쯤 되는 하얗게 회칠한 돌담이 집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름은 집 두 채 사이의 골목으로 몸을 돌려 들어갔고, 시커도 손짓으로 따라오게 했다. 검은색으로 칠한 쇠문 앞에 이르자 그녀는 그의 손을 놓았다.

그녀는 편안해 보였지만, 어딘가 긴장한 기색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가 제가 태어난 집이에요, 시커.” 그녀가 문을 밀자 쇠문이 조용히 열렸다.

시커는 몸을 조금 숙여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은 아늑하면서도 제법 넓었다. 집은 낮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있었고, 미닫이문이 달린 툇마루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정성껏 지은 집이었지만 아름다움보다는 살아가기 위해 지은 집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옆에는 작은 별채가 하나 있었고, 마당 건너편에는 창고와 변소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시커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대문도, 건물도, 모든 것이 아름의 키에 꼭 맞게 지어진 것 같았다.

마당 한쪽에는 정성껏 가꾼 채소밭이 있었고, 그 둘레를 수십 그루의 과일나무가 둘러싸고 있었다. 가지마다 주황빛 열매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과육이 두툼하고 표면은 매끈했다. 시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열매였다.

거룩이 집 밖으로 나와 시커의 손을 힘 있게 잡았다. “드디어 왔군.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었어.”

그때 아주 작은 체구의 여인이 문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보다도 머리 하나는 작아 보였다. 하지만 시커는 평생 이렇게 강인해 보이는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마르고 단단한 몸, 힘겨운 삶을 견뎌 온 흔적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짧고 곱슬곱슬했고, 눈빛은 너무도 매서워 시커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녀는 시커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왜 왔는지 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난 절대로 내 딸을 너와 결혼시키지 않을 거야. 내 아름을 빼앗아 갈 순 없어.”

“나가!” 그녀가 소리쳤다.

“엄마!” 아름과 거룩이 동시에 외쳤다.

거룩은 시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용히 손님채 쪽으로 이끌었다. 아름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손님채는 무척 작았다. 팔을 벌리면 양쪽 벽에 거의 닿을 것만 같았다. 좁은 침대 하나 외에는 아무런 가구도 없었다. 거룩은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담요와 베개를 들고 돌아왔다. “아버지는 고기 잡으러 나가셨어. 오늘 밤은 거의 들어오지 않으실 거야. 푹 쉬어, 시커. 내일 아침에 보자.”

시커는 어둠 속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잠이 들었다.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시커는 이마에 닿는 입맞춤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름이 몸을 굽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장난기로 반짝였다. “엄마가 아침을 차려 주셨어요.” 그녀가 말하더니 킥킥 웃었다. “우리 둘 다요.”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 “엄마한테 꼭 엄마라고 불러야 해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속삭였다.

아름은 그를 안채로 데려갔다. 아궁이에는 작은 불이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미 가운데 놓인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시커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얼굴은 어젯밤보다 조금은 누그러져 있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상은 세 사람 몫으로 차려져 있었다. 아름의 자리, 어머니의 자리, 그리고 시커의 자리. 식탁 한가운데에는 짙은 갈색 껍질을 두른 작은 빵들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갓 구운 생선이 담긴 접시가 있었다. 껍질은 아직도 지글거렸고, 눈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시커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어부의 딸과 사랑에 빠지면서도, 아침부터 생선을 먹게 될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름에게 몸을 기울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시… 배낭에 커피는 아직 남아 있어?” 그러고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는… 별로 배가 안 고픈데요.”

“어머.” 아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럼 증명해 봐요.” 그녀는 가장 큰 생선을 골라 시커의 접시에 올려놓더니, 그의 포크를 집어 손에 쥐여 주었다.

아름도, 어머니도 모두 시커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선도 그런 것 같았다. 그는 포크로 살을 조금 떼어 냈다.

“껍질은 먹지 말아요, 바보…” 아름은 어머니를 힐끗 보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름은 접시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생선을 가운데로 갈라 껍질을 벗겨 냈다. 그리고 흰 살을 포크로 떠서 자기 포크로 시커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아름!” 어머니가 날카롭게 말했다.

“엄마!” 아름도 번개 같은 눈빛으로 받아쳤다.

“맛있네요.” 시커가 최대한 그럴듯하게 말했다.

아름의 어머니는 피식 웃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아름도 시커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름은 다시 접시를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가시는 되도록 드시지 마세요.”

시커는 아름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식사를 이렇게 맛있게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한입 먹을 때마다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침 생선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지막 한입까지 다 먹은 시커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름이 그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그리고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엄마, 잘 먹었습니다.

“엄마, 잘 먹었습니다.” 시커가 조용히 말했다.

“나가!” 아름의 어머니가 소리쳤다.

아름은 웃음을 참지 못해 거의 사레가 들릴 뻔했다. 웃느라 눈물까지 흘렀다.

“아빠가 당신을 위해 특별한 걸 준비하셨어요.” 그녀가 겨우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분명 마음에 들 거예요.”

***

시커와 아름은 거룩과 함께 해변을 따라 난 길을 걸었다. 바다는 눈 닿는 곳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아침 햇살이 물결 위에서 반짝였다. 머리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길게 울었다.

아름은 시커의 손을 잡으려다 문득 멈추었다. 거룩이 두 사람 사이를 걸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무 예고도 없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한 손으로는 시커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아름의 손을 잡더니 두 사람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아 주었다. “왕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을 반대편의 작은 집에 이르자 아름이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온유! 나야, 아름!”

젊은 여인이 문을 열었다. 누가 봐도 아름의 언니였다. 아름보다 조금 나이가 들어 보였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시커.” 그녀가 따뜻하게 말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거룩 오빠에게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목소리는 조용하고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수줍음이 묻어났다.

도대체 거룩은 자기 이야기를 언제 그렇게 많이 했다는 걸까? 만나고 나서 열 마디도 채 하지 않았는데.

방은 아담했다. 어린 여자아이가 바닥에 앉아 장난감을 늘어놓고 놀고 있었다. 벽에는 책장이 가득 놓여 있었고, 책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온유는 한쪽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고, 자신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아름은 시커 곁에 바싹 붙어앉아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 남편이에요. 배움.” 온유가 소개했다. 그의 인상은 무척 강렬했다. 밝은 눈과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시커는 아름의 귀에 손을 가리고 속삭였다. “당신, 형부가 이렇게 잘생긴 줄은 한 번도 말 안 했잖아.”

아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배려 언니 남편을 보면 깜짝 놀랄걸요. 당신도 분발해야겠네요.”

온유는 시커에게 아름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순례자가 되었는지 물었다. 그들은 불확실 마을 이야기와 음악을 사랑하게 된 이야기, 공부하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러다 온유는 그의 책에 대해 물었다.

배움은 시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시커는 행상인에게서 너무 갖고 싶었지만 살 돈이 없어 포기했던 책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배움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걸어갔다.

그는 은색 글씨가 새겨진 검은 가죽 장정의 책 한 권을 꺼내 시커의 손에 올려놓았다.

에바의 속량.

시커는 책을 펼치는 순간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온유도. 배움도. 심지어 아름까지도.

거대한 붉은 용이 에바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

“또 돌아왔군, 에바드네 부인.” 용이 쉿쉿거리며 말했다. “작가가 이야기를 몇 번을 다시 시작하든, 넌 절대로 이길 수 없어.”

용은 비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페레그린 경.” 그 칭호는 그의 입에서 썩은 냄새처럼 흘러나왔다. “그는 언제나 죽는다, 부인. 너도 알잖아.”

에바는 믿음의 방패를 들어 몸을 숨겼다. 간신히 제때였다. 그 순간 두려움의 군주 바알세불이 불길을 가로질러 태연히 걸어 나와 그녀의 곁에 섰다.

“배신자!” 용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

아름이 그의 팔을 흔들었다. “시커!”

그가 눈을 깜빡였다. “응?”

배움이 다시 말했다. “가져가세요. 제 선물입니다.”

“고맙습니다.” 시커와 아름이 동시에 말했다.

시커는 바닥으로 내려앉아 장난감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어린 여자아이는 방긋 웃으며 인형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나도 이런 딸을 하나 갖고 싶다.” 그가 말했다.

아름도 그의 곁에 앉아 아이를 무릎에 올리고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우리도 가질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약속해요.”

아름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커의 손을 잡았다. “아빠를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면 안 돼요. 당신, 약속 지켜야 하잖아요.” 그리고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한테 한 약속.”

***

아름의 아버지는 두 사람이 돌아왔을 때 이미 일어나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오랜 세월 바람과 비를 맞아 거칠게 변해 있었다. 그는 우물 뚜껑을 치워 두고 긴 밧줄로 무언가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아빠가 어젯밤에 문어를 잡으셨어요.” 아름이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말했다. “아주 특별한 음식이에요.”

아름의 아버지는 문어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문어는 그녀의 손안에서 꿈틀거렸고, 아름은 기쁨에 작은 비명을 질렀다. 시커의 눈은 커졌다.

아름의 아버지가 손을 내밀었다. 시커는 그렇게 힘세고 거친 손을 난생처음 잡아 보았다.

“시커.” 그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나랑 한잔하자. 이야기 좀 하자꾸나.”

아름의 아버지는 그를 집 안으로 데려가 나무 마루에 앉더니 시커에게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벽 한쪽에는 이불과 베개가 가지런히 개켜 쌓여 있었다.

아름은 작은 상 하나를 들고 와 시커와 아버지 사이에 내려놓고는 아버지 곁에 앉았다. 이어 어머니가 포크 몇 개와 문어가 담긴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그것들을 상 위에 올려놓고 남편의 다른 쪽에 자리를 잡았다.

익히지도 않았다. 접시 위의 문어 다리들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시커는 목이 바짝 말랐다. 그는 아름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장난기가 전혀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먹거나… 그녀를 잃거나.

아름의 아버지는 뒤에서 병 하나와 잔 두 개를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병마개를 뽑은 뒤 병을 시커에게 건네고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아름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커는 그녀의 아버지 잔에 술을 따르고 자기 잔에도 따르려 했다. 그러자 아름은 고개를 저으며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안 돼요.

하지만 아름의 아버지는 병을 가져가 직접 시커의 잔을 채웠다.

아름의 아버지는 투명한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시커도 그대로 따라 마셨다. 목이 타들어 갈 듯 뜨거웠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아름의 아버지는 포크로 문어 다리 하나를 찍어 한입 베어 물고 천천히 씹었다. 아름과 어머니도 각자 포크를 들어 먹기 시작했다.

아름은 정말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나쁠 리는 없겠지. 시커는 포크를 들어 조심스럽게 한 조각을 집어 씹지도 않고 삼켰다. 문어가 목구멍 뒤에 달라붙었다. 거의 헛구역질이 나올 뻔했다. 아름이 조용히 킥 웃었다.

아름의 아버지는 다시 그의 잔을 채워 주고 병을 건네주었다. 시커가 이번에는 답례로 아버지 잔을 채우려는 순간, 어머니가 잔을 홱 빼앗아 갔다.

“안 돼.”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커는 문어를 한 점 더 집어 이번에는 천천히 씹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질겼다. 그는 술로 그것을 넘겼다.

아름의 아버지는 다시 세 번째 잔을 따르기 시작했다.

“아빠!” 아름이 눈을 번쩍이며 날카롭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듣지 않은 척 술을 끝까지 따랐다.

시커는 그것마저 단숨에 들이켰다. 아름의 아버지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넌 아름을 사랑하는구나.”

질문이 아니었다.

갑자기 아름의 어머니가 외쳤다.

“난 절대로 아름을 저 아이와 결혼시키지 않을 거예요!”

아름의 아버지는 차분히 아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아름은 상 반대편으로 돌아와 시커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전 아름을 사랑합니다. 앞으로도 언제나 사랑할 겁니다.” 말이 놀랄 만큼 쉽게 흘러나왔다. 술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도요.”

아름의 눈이 불타올랐다. 태양보다도 밝게 방 안을 환히 비추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눈빛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아버지는 다시 한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은 여기 남는다.” 그가 말했다. “넌 혼자 돌아가거라.”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손짓했다. “아름이 살 집을 짓고… 그녀를 책임질 수 있게 되면… 다시 오너라. 내 허락을 주마.”

아름은 그의 손을 힘껏 쥐었다. 그러고는 아직도 꿈틀거리는 문어 한 점을 포크로 찍어 그의 입속에 쏙 밀어 넣었다.

***

시커는 등을 꼭 끌어안고 잠든 아름의 온기에 눈을 떴다.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아름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길고 오래 이어진 키스였다. 두 사람은 숨이 찰 때까지 서로를 놓지 않았다.

“오늘은 떠나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당신과 함께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우린 허락을 받았잖아.” 시커가 말했다. “그것만 있으면 돼. 이제 시간문제야.”

아름은 몸을 일으켜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 허락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허락은 아니에요, 시커.”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아빠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거라는 걸 아세요. 그리고…” 그녀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 “당신이… 나를 데리러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하세요.”

“하지만 아버님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시잖아.”

“당신에게 줄 게 있어.” 시커가 배낭을 뒤적이며 말했다. 그러다 작게 웃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가에서 몇 구절을 베껴 적은 거야.”

남쪽에서 올라오는 이가 누구인가?
달처럼 아름답고,
해처럼 찬란한 이여.
나와 함께 가자,
내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순결한 이여.
겨울은 지나갔고,
봄이 찾아왔으며,
노래할 계절이 왔다.
일어나라,
나의 아름이여.
사과로 나를 먹여 다오.
나는 사랑으로 병들었노라!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지만…
너처럼 아름다운 이는 없다.

아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정말… 아름다워요.” 그녀가 말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공기에는 말보다 더 무거운 그리움이 가득 차 있었다.

“아름.” 시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아픔을 견딜 수가 없어. 당신이 너무 보고 싶을 거야.”

“며칠처럼만 느껴질 거예요, 자기.”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게다가… 난 매일 밤 당신 꿈에 찾아갈 거예요. 약속해요.”

“가기 전에…”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에게 줄 게 하나 있어요.”

그녀는 손을 들어 반지를 살짝 돌렸다. 햇빛이 일곱 개의 눈부신 다이아몬드 위로 폭포처럼 쏟아졌다. “난 이 반지를, 내가 당신의 사람이라는 약속으로 끼고 있어요. 절대 의심하지 말아요.”

그녀는 드레스 목선을 따라 손을 넣어 가느다란 은목걸이를 꺼냈다. 그 끝에는 황금 반지 하나가 달려 있었다. 그녀는 등을 돌려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목걸이 좀 풀어 주세요, 시커.”

목걸이를 푼 뒤 그녀는 반지를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오닉스가 박혀 있었고, 양옆에는 나무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왕의 사자 비밀이 제게 이 반지를 간직하라고 했어요. 함께 하늘 도성까지 걸어갈 사람을 만날 때까지요. 그 사람의 것이니까요.”

그녀는 다시 반지를 집어 시커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놀랍도록 꼭 맞았다. “이건…” 그녀가 경이로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거예요.”

“이 반지를 거룩한 약속으로 간직해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나에게만 하는 약속이 아니라… 왕께 드리는 약속으로요.”

그리고 그녀는 눈에 번개를 번뜩이며, 햇살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억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내 사람이에요. 영원히… 나만의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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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ey – Part II

9월 3, 2026 by K. Blackthorn

시커는 아름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녀는 이미 불을 다시 피워 놓았고, 작은 냄비에서는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그녀는 뜨거운 물을 그의 양철 컵에 따라 주고는 냄비를 뒤집어 근처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잠꾸러기.”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깎아 만든 나뭇가지로 음료를 저은 뒤 컵을 그에게 건넸다. 통역자의 집에서 커피는 또 어디서 구한 걸까? 대체 그 배낭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거지? 시커는 한 모금 마시고는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내 컵이랑 내 칼까지.” 그는 짐짓 못마땅한 척 말했다. “내 배낭에서 또 뭘 꺼낸 거야?”

아름은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천만에요, 시커.”

“묻기 전에…” 그녀는 가볍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여기 당신 감미료예요.”

그는 나뭇잎 사이로 비친 아침 햇살이 이슬을 말려 놓은 풀밭을 찾아가 앉았다. 아름은 작은 빵 한 덩이를 내밀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배 안 고파.”

새들이 나뭇가지에서 노래했고, 다람쥐 한 마리가 다른 다람쥐를 쫓아 가까운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어제는 왜 그렇게 시간에 쫓겼던 걸까? 오늘 하루만 아름과 함께 걸으면 어둠의 땅에 도착할 텐데. 그때 문득 파멸의 도시가 떠올랐다. 이제는 말해야 했다. 왜 그는 좋은 순간마다 망쳐야만 하는 걸까? 매번.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아름, 이리 와.” 그는 자기 옆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며 그녀를 불렀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다리를 들어 올려 장화를 벗기고 양말을 벗겨 냈다. “할 말이 있어.”

배낭에서 붕대를 꺼내자 아름이 물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입 맞춰 주면 나을까요?”

그는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뒤꿈치와 발가락 두 곳에 붕대를 감아 주었다. “냄새나는 발에는 입 안 맞출 거야!”

아름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말없이 다른 발을 내밀었다.

“아름, 난 당신을 속이려던 게 아니야. 미안해.” 그가 말했다. “그냥… 언제 말해야 할지 끝내 찾지 못했어.” 다른 발에는 물집이 하나뿐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걸을 때 발을 쿵쿵 구르지 마, 우리 아기.” 그것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붕대를 다 감고 장화도 다시 신겨 준 뒤, 아름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두 손을 자기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래서요?”

쉽게 말할 방법은 없었다. 그냥 말해야 했다. “우리 엄마는 아빠를 떠났어. 그래서 내가 혼자 불확실 마을에 있었던 거야.”

“왜요?” 그녀가 거의 속삭이듯 물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안에는 저주가 있어. 거인 진노가 우리 아버지를, 그 아버지를, 또 그 이전 사람들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따라다녔어.” 그녀의 눈에는 오직 다정함만이 담겨 있었다.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망가뜨려. 늘 그랬어.”

“당신은 당신 아버지가 아니에요.” 그녀의 눈에 번개가 번뜩였다. “그리고 난 당신 어머니가 아니에요.”

그녀는 두 팔로 그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

파멸의 도시로 가는 길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밟아 온 큰길이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언덕을 하나 넘자 도시의 성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름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의 다 왔네요.”

시커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거리도 잘 못 재는군.” 그러다 그녀의 상처받은 눈빛이 떠올라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래도 아직 한참 걸어야 해, 우리 애기.”

“시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아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당신 동생 이야기나 해 주세요.”

“생각 깊은 이 말이야?” 시커가 웃었다. “가끔은 생각 없는 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야 했나 싶다니까. 그래도 좋은 녀석이야.”

“이야기가 별로 없네요.”

“나보다 한참 어렸거든. 부모님이 날 불확실 마을에 두고 떠났을 때가, 그 애가 겨우 재미있어질 나이였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래도 그때 한 번은…” 시커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뭔데요?”

“아니.”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도시에 가까워지자 시커가 말했다. “이름하고는 전혀 다르죠?” 회반죽은 새로 바른 듯 깨끗했고, 성벽도 말끔했다. 어쩌면 최근에 다시 칠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성문을 지나자 목조 골조로 지은 삼사 층짜리 집들이 줄지어 그들을 맞이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삐 오가고 있었고, 도시 전체에는 낮은 이야기 소리가 잔잔히 퍼져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거대한 구리상이 우뚝 서 있었다. 사자의 머리, 곰의 손과 발, 온몸을 덮은 물고기 비늘. 등에 돋친 용의 날개는 거만하게 펼쳐져 광장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징그러워요.” 아름이 말했다.

“아폴루온.” 시커가 비문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백 년이나 지났는데도 아무도 이걸 치울 생각을 안 했네.”

시커는 배낭에서 작은 검은 수첩을 꺼냈다. “흠…”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디 보자.”

아름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가요. 여기 너무 으스스해요.”

아름이 그를 광장 밖으로 끌고 가는 동안에도 시커는 계속 수첩을 넘겼다. “여기다.” 마침내 그가 한 골목을 내려다보고 다시 다른 골목을 살폈다. “집은 다리 건너편에 있을 거야.”

그는 아름의 손을 잡고 골목 하나를 지나고 또 하나를 지나 마침내 강가에 이르렀다. 우아한 목조 다리가 강 위를 둥글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강물을 가리켰다. “역시 맞았네. 이 강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아래에서는 물살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며 진흙을 휘저었고, 썩은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혼란의 강.” 그가 말했다. 강물이 자신을 비웃으며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절망의 수렁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다리는 하나도 없어.” 그러더니 덧붙였다. “아, 여기랑… 우둔 마을은 빼고. 거긴 다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하나 더 있어요.” 아름이 말했다. “어둠의 땅으로 가는 길에도요. 거기서는 항구로 흘러들어가요.”

강 건너편에 이르자 시커는 길을 물었다. 그리고 골목 하나를 지나 또 다른 골목을 돌아 마침내 다른 거리로 나왔다.

“정말 길을 아는 거 맞아요?” 아름이 물었다.

시커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글쎄?”

마침내 두 사람은 작은 집 앞에 섰다.

“애기, 당신이 노크해.”

***

생각 깊은 이가 문을 열고 잠시 아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시선이 시커에게 옮겨갔다. “시커?” 그는 집 안을 향해 돌아서며 소리쳤다. “엄마! 시커 왔어! 그것도…”

아름의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그녀는 시커에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당신 동생이 이렇게 귀여운 줄은 몰랐네요.”

“흥.” 시커가 코웃음을 쳤다.

시커의 어머니는 그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이내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엄마.” 시커가 말했다. “여기는 아름이에요. 제…”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결혼할 사람이에요.” 그는 아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우리 엄마예요. 그리고 저 말 안 듣는 동생, 생각 깊은 이.”

“아름.” 시커의 어머니가 그녀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았다. “어서 들어오렴. 앉아. 물이라도 한 잔 줄까?”

“배고프니?” 그녀가 물었다. “아직 저녁때는 아니지만, 배고프면 금방 뭐라도 만들어 줄 수 있어.”

“괜찮아요, 엄마.” 시커가 말했다. 아름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머물 수는 없어요. 해 지기 전에 어둠의 땅까지 가려고 하거든요.”

“어둠의 땅?” 시커의 어머니가 되물었다. “거긴 위험한 곳이야. 아름은 어둠의 땅 사람이니?”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시커를 바라보았다.

아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시커는 자신이 어떻게 불확실 마을을 떠났는지 이야기했다. 물론 절망의 수렁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빼놓았다. 그는 동행인과 오두막, 그리고 밀밭에서 아름을 처음 만난 일을 들려주었다. 아름도 중간중간 끼어들어 이야기를 이어 갔다. 물론 크리스마스에 나누었던 키스는 빼고.

시커의 어머니는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가 웃어 주길 바랐다. 아름를 안아 주기라도 하길 바랐다. 뭐라도.

시커의 어머니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생각 깊은 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커, 보여 줄 게 있어.”

시커는 자리에서 일어나 생각 깊은 이를 따라 방 한쪽으로 갔다. 등 뒤에서 아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시커의 아버지를 떠나셨어요?”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는군.

“이것 좀 봐.” 생각 깊은 이가 웃으며 종이 뭉치를 들어 보였다.

방 반대편에서 아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해가 안 돼요. 그냥… 같이 즐겁게 지내면 안 되는 건가요?”

생각 깊은 이가 그린 것은 젊은 여자들의 그림이었다. 모두 옷은 입고 있었지만 몸매는 지나치게 굴곡져 있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머리가 없었다. 시커는 피식 웃었다. “재능은 있네.”

“아니요.” 아름이 단호하게 말했다. “전 용서는 정말 그렇게 단순한 거라고 믿어요.”

“엄마가 이걸 보면 날 죽일 거야.” 생각 깊은 이가 말했다. “형이 좀 맡아 줄래? 잠깐만.”

시커는 그림들을 조심스럽게 접어 배낭에 넣었다. 바로 그때 이번에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거인 진노에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어 보고, 나만큼 눈물을 흘려 본 다음에야 나를 판단해도 늦지 않아!”

생각 깊은 이는 시커를 바라보았다. “형… 그냥 그 여자 잊어버리는 게 어때?”

“내 아들이 널 힘들게 할 거야.” 시커의 어머니가 말했다. “아름, 널 아껴서 하는 말이야.”

“전 어머님이 아니에요!”

생각 깊은 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아름은… 좀 기가 센 것 같긴 해.”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지나치게 컸다.

***

아름은 뒷골목을 걸어가는 내내 충격을 받은 듯 말이 없었다. 시커는 계속 여행을 이어 가자고 여러 번 설득했지만, 그녀는 끝내 그의 아버지를 꼭 만나겠다고 고집했다. 정말 고집이 셌다.

조금 더 머물렀다. 분위기도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떠날 때는 아름과 시커의 어머니가 서로를 안아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시커는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어머님은 절 싫어하셨어요.”

“아니야, 아름. 엄마는 원래 그런 분이야. 시간을 드리면 돼. 나처럼 당신을 사랑하게 되실 거야.”

“그리고 전 기 센 사람도 아니에요!” 그녀의 눈에 번개가 번뜩였다.

“난 그런 말 안 했잖아.”

“그래도 아니라는 말도 안 했잖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아름…” 시커가 말했다. “조금… 아주 조금은 기가 셌어요.”

“엄마 말로는 아빠가 여기 사신대.” 시커가 문 앞으로 다가가 노크했다. “이번에는 얌전히 있어.”

시커의 아버지가 문을 열었다. “오, 시커!” 그는 활짝 웃으며 시커를 끌어안았다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누구지?”

“전 아름이에요.”

“정말 딱 맞는 이름이구나!” 시커의 아버지가 말했다.

아름은 웃음을 터뜨렸다. “시커도 저한테 똑같이 말했어요!”

“그럴 만도 하지.” 시커의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들은 보는 눈이 좋거든!”

집은 아주 작았다. 방 하나가 전부인 것 같았다. 시커의 아버지는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 위를 대충 치우더니 둘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이야기해 보렴.”

시커는 불확실 마을을 떠난 일부터 아름을 만난 일, 그리고 청혼한 순간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커의 아버지는 아름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널 딸이라고 불러도 되겠니? 아직은 너무 이른가?”

아름이 미소 지었다. “네. 그렇게 불러 주시면 정말 좋겠어요.”

“엄마는 만나고 왔니?” 시커의 아버지가 물었다. “설마 절망의 수렁 이야기는 하지 않았겠지? 엄마 성격 알잖니.”

“아니요.” 시커가 말했다. “수렁 이야기는 안 했어요. 엄마는 만나고 왔지만요.”

“왜 이렇게 사세요?” 아름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더 나은 삶을 원하지 않으세요?”

“시커 엄마가 날 떠날 때,” 그가 말했다. “모든 걸 가져갔어.” 그는 시커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지.”

“시커 어머님도 작은 집에 사시고, 아버님도 작은 집에 사시잖아요.” 아름이 말했다. “다시 함께 사시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텐데요.”

“나도 그러려고 애쓰고 있어.” 그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전 어머님께도 말씀드렸어요. 용서는 어렵지 않다고요. 같이 식사하시고, 서로 웃어 주세요. 지난 일은 잊으시고요.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노력하시면 되잖아요.”

시커의 아버지 목에 핏줄이 불거졌다. “잘 들어. 난 죽도록 일하고 있어. 있는 힘을 다해서 애쓰고 있다고. 그런데 아무도, 아무도 나한테는 관심이 없어. 아무도.”

아름은 움찔하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입을 열려 했지만, 시커가 그녀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아름.”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커의 아버지 얼굴에서 붉은 기운이 서서히 가셨다. 아름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버지, 오늘 뵈어서 정말 좋았어요.” 시커가 말했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시커의 아버지는 아름을 다시 한번 꼭 안아 주었다. “몸조심하렴, 아름. 내 딸. 꼭 다시 보러 와.”

“그럴게요.” 아름이 조용히 대답했다.

***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골목을 지나고, 거리를 지나고, 흉측한 아폴루온의 동상을 지나 마침내 성문을 빠져나왔다. 길은 파멸의 도시 외곽을 따라 굽이쳤다. 혼란의 강 위에 놓인 돌다리를 건넌 뒤에야 아름이 입을 열었다.

“당신 아버지가 대머리인 줄은 한 번도 말 안 했잖아요.”

“뭐?”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 그게 아름이 얻은 결론이란 말인가?

“난 당신은 대머리 안 됐으면 좋겠어요. 다른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난 대머리 안 돼, 아름.” 시커가 말했다. “난 외할아버지를 꼭 닮았거든. 외할아버지는 대머리가 아니셨어.”

“그건 모르는 일이죠.” 그녀가 훌쩍였다. “당신 어머니는 절 싫어하시고… 당신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하셨어요.”

“원래 안 그러셔.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그러니까 엄마가 떠난 거잖아.”

“당신은 그러잖아요. 당신은 항상 미안하다고 하잖아요.”

“응. 그러려고 노력하지.”

“그런데 만약…”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언젠가 그러지 않게 되면요?”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시커도 그녀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미워!”

시커는 눈물을 꾹 참았다. “그런 말은 너무 심해, 아름. 정말 아파. 너무 아프다고. 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시커.” 그녀가 말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그녀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시커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숫사슴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엄한 뿔이 머리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 사슴은 가만히 서서 아름을 바라보았다.

아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몸을 돌려 시커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래요. 난 정말 당신을 사랑해요, 시커.”

어쩌면… 정말 그만큼 단순한 일인지도 몰랐다.

***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시커와 아름은 어둠 속을 계속 걸었다. 큰곰자리는 말없이 그들 뒤를 따라 천천히 하늘을 돌고 있었다.

“야영할 필요 없어요, 시커. 거의 다 왔어요. 전 어둠의 땅을 아주 잘 알아요.”

“그 말은…” 시커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어둠의 땅이 항상… 어둡기만 한 건 아니라는 뜻이야?”

아름은 그의 손을 찰싹 때렸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저 멀리, 조용한 어촌 마을의 불빛들이 반짝이며 일렁이고 있었다.

“빨리 와요, 여보— 우리 집이에요!” 아름이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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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ey – Part I

9월 2, 2026 by K. Blackthorn

시커가 공동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아름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 짐도 모두 꾸려 놓았고, 의지가 약한 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모두가 그를 믿음에 굳센 이라고 불렀다.

“아름 양, 이 침낭을 가져가십시오.” 믿음에 굳센 이가 말했다. “이젠 제게 필요 없으니까요. 그리고 시커, 이건 동행인의 것입니다.” 그는 익숙한 침낭을 가리켰다. “저도 오늘 떠납니다. 제 차례는 끝났거든요.” 그의 얼굴에서 먹구름은 완전히 걷혀 있었고, 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시커는 그가 그렇게 활짝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집으로 돌아갑니다. 제 아내에게요!”

명랑 양이 분주하게 식당으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샌드위치를 찾는 시커!” 그녀가 경쾌하게 외치며 작은 리넨 꾸러미를 아름의 배낭 속에 쏙 넣어 주었다. 그러고는 아름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찾고 있던 게 무엇이든, 이제는 찾은 것 같네요.”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믿음에 굳센 이가 덧붙였다.

“그럼요! 자, 다들 앉아요. 빈속으로 길을 떠나는 건 좋지 않답니다.” 이번에는 명랑 양도 망설임 없이 함께 자리에 앉았다.

믿음에 굳센 이는 아침 식사를 허락하신 것과 명랑 양을 위해, 그리고 앞에 놓인 여정을 위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어 왕께서 시커와 아름의 여행을 축복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그러자 명랑 양도 조용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시커와 아름의 길을 지켜 주시고, 앞으로 살아갈 삶도 언제나 주님의 손으로 보호하여 주옵소서.”

식사를 마친 뒤, 믿음에 굳센 이는 좁은 길을 따라 북쪽으로 떠났고, 시커와 아름은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명랑 양은 해석자의 집 폐허 앞에 서서 오래도록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

그날은 더없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눈부셨으며, 느긋한 바람이 살며시 불어왔다. 구름은 갈 곳도 없는 듯 천천히 하늘을 흘러갔다. 아름은 시커의 곁을 걸으며, 의미 있는 이야기와 별것 아닌 이야기를 끝없이 이어 갔다.

두 사람이 좁은문에 이르자 아름이 여름 응접실을 가리켰다. “시커, 우리 잠깐 쉬었다 갈까요?” 그녀가 물었다.

응접실은 시커가 기억하는 그대로 먼지가 수북했다. “우물이 있어요.” 아름이 말했다. “근처에 두레박도 있을 거예요. 물 좀 길어다 주실래요?” 그녀는 빗자루를 찾아 쓸기 시작했다. 시커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마른 천으로 탁자를 닦고 있었다. 그녀는 천을 물에 적셔 물병을 깨끗이 닦은 뒤, 두레박으로 길어 온 물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어떻게 우물과 두레박이 있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아름은 시커보다도 좁은문을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해는 벌써 높이 떠오르고 있었고, 아직 갈 길은 멀었다.

“아름,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시커가 서성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청소만 했다. “쉰다고 하지 않았어요?”

“됐어요.”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안락의자를 가리키고 소파의 먼지를 툭툭 턴 뒤 자리에 앉았다. “생각을 좀 했어요…”

“우리가 걸어왔어야 하는 시간에 말이죠.”

아름이 눈살을 찌푸렸다. “쉬어야 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다음에 올 순례자들을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청소해야 하잖아요.”

“생각을 좀 했어요.” 그녀가 다시 말했다.

우리가 걸어왔어야 하는 시간에. 시커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가는 길에,” 아름이 말을 이었다. “당신 부모님도 찾아뵈어요.”

“안 돼요.” 시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왜 안 되는데요, 시커? 저는 꼭 두 분을 만나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 “아니… 결혼할 거예요. 그건 당신도 알잖아요.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축복해 주시지 않을 거예요.”

시커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길이 너무 돌아가요, 아름. 아주 먼 길이에요. 당신도 많이 피곤할 거예요.” 그녀는 전혀 납득하지 않는 눈치였다. “다음에요.” 그가 말했다. “약속할게요. 그때는 꼭 부모님을 만나게 해 드릴게요.”

고집스러운 표정이 아름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저를 데려가든지… 아니면 지금 당장 돌아가요.”

시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마침내 그가 말했다. “하지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아름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은 뒤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그의 불안한 마음을 눈치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야기해야 할 일이었다.

***

베엘세붑의 성 앞에 이르렀을 때, 황량하고 차가운 성채가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버려진 채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아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시커, 안에 들어가 봐요!”

“안 돼요.”

“삼백 년이나 비어 있었잖아요! 예전처럼 모험도 하고요.”

“안 됩니다.”

아름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예전의 당신은 재미있었는데.”

시커는 어이가 없었다. 정말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걸까? “아름, 애기.” 그가 차분히 말했다. “수렁을 밤에 건너고 싶어요?” 잠시 말을 멈춘 뒤 덧붙였다. “안 돼요. 이제 애처럼 굴지 말아요. 다음에요. 약속할게요.”

***

해는 어느새 하늘 한가운데를 지나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름은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 듯했다. 아니면 아직 화가 난 것일 수도 있었다. 시커는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피곤해요.” 아름이 투덜거렸다. “발도 아프고요.”

“그럴 만도 하죠, 아름.” 여행 중에 좁은문을 청소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배고파요.” 그녀가 발을 쿵쿵 굴렀다. “당신은 사람을 너무 부려먹어요.”

“이제 발이 더 아프겠네요, 우리 애기?” 시커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도 꽤 배가 고파요.” 그는 근처의 올리브나무를 가리켰다. “저기서 명랑 양이 뭘 싸 주셨는지 봅시다.”

아름은 올리브나무 그늘 아래 부드러운 풀밭에 앉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짙은 왕실 푸른빛을 띤 길고 가느다란 줄기, 은은한 보랏빛이 스며들고 황금빛 결이 흐르는 꽃잎. 세 장은 위를 향하고, 세 장은 아래로 우아하게 굽어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리넨 꾸러미를 꺼내 조심스럽게 풀었다.

안에는 샌드위치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이건 제 거.”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이건 우리 남편 거.” 이번에는 얼굴도 붉히지 않았다.

새들이 두 사람 주위를 노래했다. 꽃들은 바람에 흔들렸다. 그리고 아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시커는 그냥 이곳에 남고 싶었다. 풀밭에 누워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름은 부츠 한 짝을 벗고 양말도 벗어 내렸다. 뒤꿈치에는 물집 하나가 부풀어 있었고, 발가락에도 두 개가 더 잡혀 있었다. “제가 발이 아프다고 했잖아요.”

“우리 애기 많이 아팠겠네요.” 시커가 말했다. “이제 발을 쿵쿵 구르지는 말아요.”

***

해가 지평선 너머로 기울 무렵, 두 사람은 수렁에 도착했다. 시커는 눈앞의 광경에 놀랐다. 징검다리도 없었고, 동행인이 설명해 주었던 낡은 다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깊숙이 박아 넣은 말뚝들이 진창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고, 한때 모든 것을 삼켜 버리려 했던 수렁 위에는 튼튼한 다리가 놓여 있었다. 두꺼운 활엽수 판자는 놀라울 만큼 잘 보존되어 있었고, 견고한 목재 구조물이 수렁 전체를 가로질러 떠받치고 있었다. 양옆에는 낮은 난간도 설치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다리 위에 올라서자 아름은 시커의 팔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수렁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저기요.”

“저기 뭐가 있어요?”

“제가 빠졌던 곳이에요.” 그녀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시커는 다시 수렁의 진창이 몸의 온기를 빨아들이던 감각을 떠올렸다. 발버둥 치던 기억, 며칠이나 지난 것처럼 느껴졌던 시간, 그리고 결국 의식을 잃었던 순간까지. 동행인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수렁 가장자리였다. 풀도 보였고, 꽃도 보였다. 참새들 지저귀는 소리까지 아직 들리는 곳이었다.

시커는 웃고 말았다.

아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불꽃도 없었다. 번개도 없었다. 그저 깊고 조용한 슬픔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시커의 팔을 놓더니 등을 돌려 천천히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아름, 잠깐만요. 미안해요.” 시커가 급히 뒤따라갔다. “비웃으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냥… 제가 거의 죽을 뻔했던 걸 떠올리니까…” 그는 숨을 골랐다. “그래도 인정해야죠…”

아름이 돌아섰다. 눈물은 이미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저를 과소평가해요.” 그녀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강하고, 저는 약해요. 저는 아파요. 그런데 당신은… 아픈 것조차 저보다 더 잘하잖아요.”

“미안해요…” 시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전 당신이라면 제 마음을 이해해 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사랑한 거예요.” 아름이 말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줄 알았는데.”

시커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하자, 아름은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혼자 다리를 건너 걸어가 버렸다.

***

수렁 건너편 낮은 언덕 아래에는 작은 숲이 우거져 있었다. 아름은 이미 배낭을 내려놓고 침낭을 펼치고 있었다.

시커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무사히 수렁을 건넜다. 아까 웃어 버린 일은 후회스러웠다. 아름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왜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어려운 사람이었을까?

그는 자신의 침낭을 그녀의 침낭 가까이에 펼쳤다. 그녀를 지켜 줄 만큼은 가깝게, 하지만 그녀에게 공간을 줄 만큼은 떨어져서.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큰곰자리는 이미 하늘을 돌기 시작했고, 이 계절에는 사냥꾼자리를 보기엔 너무 늦었지만, 새벽 해 뜨기 직전이라면 어쩌면 잠깐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시커는 마른 나뭇가지를 몇 개 모아 먼저 지나간 여행자들이 남겨 둔 화덕 안에 가지런히 쌓았다. 배낭에서 동행인이 주었던 부싯돌과 부시를 꺼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불길이 따뜻하게 피어올랐다.

아름은 이미 침낭에 누워 쉬고 있었다. 시커도 그녀의 곁에 몸을 눕혔다. 그러자 아름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침낭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시커가 바라보고 있는 반대편으로 걸어가더니, 그의 침낭에 꼭 맞닿도록 자기 침낭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그의 몸에 온몸을 기대어 누웠다.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더니 깊고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우리 싸우지 말아요, 시커. 당신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아요. 미안해요. 저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그녀는 두 팔로 그를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시커. 정말… 정말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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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cision To Journey

9월 2, 2026 by K. Blackthorn

아름은 숨을 들이마셨다. “거룩 오빠!” 그러더니 좁은 길을 향해 달려갔다. 시커는 놀라 눈을 깜빡였지만 곧 그녀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소박한 옷차림의 나그네 한 사람이 길을 걷고 있었다. 지팡이도, 배낭도 없었다. 아름이 먼저 그에게 다다랐다. 그녀는 두 팔로 그를 꼭 끌어안았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그 낯선 이는 아름보다 겨우 조금 더 클 뿐이었다. 얼굴은 굳세고, 어쩌면 무섭게까지 보였지만, 그의 눈에는 어딘가 익숙한 따뜻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아름이 안겨 있는 동안 그는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여 주었고, 시커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거룩 오빠! 정말 보고 싶었어요. 여기에는 어쩐 일이에요? 정말 오래됐네요! 다크 랜드로 가는 길이에요? 오두막에도 들를 거죠? 오늘 밤은 묵고 가는 거죠?”

시커가 두 사람 곁에 다가오자 아름은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시커를 꼭 소개해 드려야 해요. 제가 이 사람한테 샌드위치를 만들어 줬고… 아, 또 앞질러 말해 버렸네. 저 이 사람을 사랑해요. 그리고 우리 결혼할 거예요. 하지만 그 전에…”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더니 씩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참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시커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커, 제 오빠 거룩이에요.”

거룩의 악수는 힘 있고 단단했다. 그는 잠시 시커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부드럽군.” 그는 무심코 소리 내어 말해 버린 듯했다. “하지만 알 수 있어. 자네는 좋은 사람이야.”

아름이 곧바로 말을 가로챘다. “저 어떡하죠? 엄마 아빠는 절대로 시커랑 결혼 못 하게 하실 거예요. 정말 오래도록 생각해 봤는데도 아직 방법을 모르겠어요.” 그러고는 조금 더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왕께서 이 사람을 제게 보내 주셨어요. 그건 확실히 알아요.”

거룩은 세 사람이 함께 오두막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자 시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호세아 이야기를 아는가?” 그가 생각에 잠긴 듯 물었다.

“네.” 시커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호세아에게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하셨죠. 그녀는 창녀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예전 삶으로 돌아갔을 때도 호세아는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끝내 그녀를 찾아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의 시선이 길가의 돌멩이 하나에 머물렀다. “그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왕과 길을 잃은 순례자들에 대한 이야기죠.”

거룩은 놀라움과 흐뭇함이 섞인 눈빛으로 시커를 바라보았다. “자네도 내 동생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겠나?”

아름의 눈이 번쩍 빛났다. “거룩 오빠!” 그녀는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시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사랑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할 겁니다. 왕자께서 양 떼를 사랑하시는 것처럼요. 필요하다면 그녀를 위해 칠 년도 일할 수 있습니다. 아니, 야곱이 라헬을 위해 했던 것처럼 십사 년이라도요. 그래도 제게는 며칠처럼 느껴질 겁니다.”

거룩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는 고멜과 호세아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었다. 그의 말은 좀처럼 끊이지 않았다. 목소리는 차분했고, 말솜씨는 뛰어났다. 마치 스턴의 설교를 듣는 것 같았다. 시커는 아름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름도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역시 가족은 닮는 법인가 보다. 그는 혼자 피식 웃었다.

세 사람은 오두막으로 이어지는 갈림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점심 먹고 가요.” 아름이 말했다. “할 이야기가 정말 많아요.”

“아니다.” 거룩이 단호하게 말했다. “해 지기 전에는 집에 도착할 생각이다. 빈속으로 걷는 게 편하고, 저녁에는 어머니가 구워 주시는 생선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구운 생선이라…” 아름이 한숨을 쉬었다. “명랑 양 스튜에도 생선만 들어가면 훨씬 맛있을 텐데.” 그녀는 코를 찡긋하더니 킥 웃었다.

거룩은 시커의 양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시커, 난 자네가 마음에 드네.” 그러고는 아름을 돌아보았다. “짐을 싸서 집에 놀러 오너라. 온유도 와 있을 거다. 그리고 시커도 함께 데려오렴.”

“거룩 오빠… 정말 시커를 데려가도 돼요? 아빠가… 엄마가…”

거룩은 다시 시커를 바라보았다.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을 걸세. 자네가 아름을 잘 돌봐 줄 거라고 믿네. 부모님께는 내 친구라고 소개하겠네.”

그는 한 손으로는 아름의 손을, 다른 한 손으로는 시커의 손을 잡았다. “나머지는 자네들에게 달려 있다.” 그는 시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의심하지 말게. 정말 왕께서 자네를 아름에게 보내셨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걸세. 우리 부모님도 반드시 축복해 주실 거야.”

그 말을 남긴 채 그는 몸을 돌려 좁은 길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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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Wonderful

8월 30, 2026 by K. Blackthorn

시커는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들마저도 오늘은 유난히 조용한 듯했다.

아름이 그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무슨 계획 있어요?”

“글쎄, 애기. 탑에서 책이나 좀 읽을까 생각 중이에요. 당신은요? 새로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어요?”

“심심해요, 시커.” 아름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새삼스럽네요, 아름. 당신은 늘 심심하잖아요.”

“재미있는 거 해요.” 그녀가 말했다. “모험 같은 거요. 예전처럼.”

“시냇가에 갈까요?”

“시시해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게다가 어젯밤에도 거기 갔잖아요. 꿈에서는 흠뻑 물장구를 쳐도 안 젖어서 훨씬 재미있는데.”

“물은 젖으라고 있는 거예요.”

“그건 당신이나 그렇죠.” 아름이 말했다. “당신은 나처럼 길고 곱슬거리는 머리가 아니잖아요.” 그녀는 곱슬이라는 말을 일부러 또박또박 강조했다. 시커가 자신의 곱슬머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이기는지도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때 어린 양치기 소년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한 손에는 종잇조각 몇 장을, 다른 손에는 짧은 숯막대를 들고 있었다. 검은 숯가루가 볼과 코에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소년이 아름을 향해 외쳤다. “초상화 하나 그려 드릴까요?”

“양이에요.” 아름이 곧바로 정정했다.

소년은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신경 쓰지 않은 것인지 이번에는 시커를 향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저씨, 동전 몇 개만 주세요. 엄마가 많이 아프세요. 아내분 초상화 하나 그려 드릴게요.”

“그냥 시커라고 불러도—”

“아직은 저 사람 아내 아니에요.” 아름이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가지런히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갰다. 머리를 뒤로 넘기고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소년은 많아야 열 살쯤 되어 보였지만 솜씨는 놀라울 만큼 좋았다. 천천히, 신중하게 연필을 움직이는 동안 아름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유지했다. 비례도 정확했고, 명암도… 정말 흠잡을 데가 없었다. 소년은 가끔씩 고개를 들었다. 먼저 아름를 바라보고, 다시 시커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림을 완성한 소년은 스케치를 시커에게 건넸다.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선은 깔끔했고, 명암도 균형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무엇이 다른지 알 수가 없었다. 시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름이 그의 손에서 그림을 홱 낚아챘다. “이거 전혀 저 안 닮았잖아요.” 그녀는 그림을 바라보다가 시커를 바라보고,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히려 저보다… 이 사람을 더 닮았네요, 이 장난꾸러기.” 그러다 문득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소년이 시커를 한번 바라봤다가 다시 아름을 향해 말했다. “아주머니를 그린 게 아니라, 따님을 그렸어요.”

아름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깐만…” 그녀가 그림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설마… 우리 둘을 합쳐서 그렸다는 거니?”

소년은 그저 씩 웃었다.

시커는 그림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름도 아니었다.

자신도 아니었다.

두 사람을 조금씩 닮은 아이였다.

“정말… 멋진 그림이네요.”

시커가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아름은 손가방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 소년의 손에 쥐여 준 뒤, 그 손가락을 꼭 감싸 쥐었다. “어머니는 괜찮아지실 거야.”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금방 낫지 않으시면 오두막으로 모셔 오렴. 어디인지 알지?”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편찮으셔서 못 오시면 네가 와.” 아름이 덧붙였다. “아름을 찾아도 되고… 명랑 양을 찾아도 돼.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꼭 도와드릴게.”

소년은 어색하지만 정성껏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금세 달려가 버렸다.

시커는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마침내 그가 말했다.

“저도요.”

아름이 그의 손을 꼭 쥐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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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ebuke in the Pasture

8월 30, 2026 by K. Blackthorn

아름은 의지가 약한 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킨드가 하신 말씀을 한마디도 못 들으셨어요?” 그녀는 분노에 몸을 떨며 소리쳤다.

의지가 약한 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아름은 그를 똑바로 가리키며 쏘아붙였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다들 알아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신 아내는 알고 있어요.”

의지가 약한 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를 보면… 젊었을 때의 아내가 떠오릅니다.”

아름은 두 발을 단단히 딛고 허리에 두 손을 얹었다. 그녀의 키는 의지가 약한 이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커는 불편한 마음으로 몸을 움직였다. 은혜로운 이는 난처한 듯 웃었고, 티르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킨드는 마치 자랑스러운 딸을 바라보듯 아름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커는 왠지 의지가 약한 이가 안쓰러웠다. 아름은 지금 그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당신은 아내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어요.” 아름이 말을 이었다. “아내는 창피해서 죽고 싶을 거예요. 차라리 남자답게 행동하세요. 평온한 시선 양을 똑바로 바라보세요. 곁눈질하지 말고요. 빵 한 조각 훔쳐 먹는 도둑처럼 몰래 훔쳐보지 말란 말이에요.”

“저… 저… 저는…” 그가 더듬거리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그게 왕자께서 양 떼를 사랑하시는 방식인가요?” 아름이 되물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시커는 그의 사과가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한테 사과하지 마세요. 왕께 용서를 구하세요. 그리고 아내에게도 용서를 구하세요.”

폭풍은 지나갔다. 아름의 눈빛에 다시 따뜻함이 스며들었다. “그래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내는 용서할 수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니… 용서할 거예요. 용서는 언제나 있으니까요.”

의지가 약한 이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고맙습니다, 아름 양.” 그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의 충고를 잊지 않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날 이후,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의지가 약한 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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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nal Acceptance

8월 20, 2026 by K. Blackthorn

시커는 오두막 앞에서 아름에게 잘 자라는 입맞춤을 했다. 그녀는 그 느낌에 끝내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부드럽게 닿는 그의 입술. 두 사람을 감싸며 봄바람마저 숨을 죽이는 듯한 그 순간. 완벽한 하루의 가장 완벽한 끝이었다.

“사랑해요.”

아름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벌써부터 익숙한 짜증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저도요.”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시커의 눈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 주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모든 것을 말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느끼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누구보다도 깊이. 시커는 입으로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마음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는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굳이 완벽했던 하루를 망치려는 걸까?

아름은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세어 보았다. 그는 여섯 번 청혼했고, 그녀도 여섯 번 승낙했다. 물론… 입으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알았어야 했다. 그녀의 삶에는 시커 말고 다른 남자는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아름, 내 아내가 되어 주세요.”

아내. 그 말은 참 달콤하게 들렸다. 사실 그녀는 첫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그걸 말로 해야 하는 걸까? 순간 성미가 욱 치밀었다. 정말 가끔은… 이 바보 같은 애기. 아니. 아름은 스스로를 멈추었다. 이제 그 말은 그의 것이었다. 자신은 그의 애기였고, 그는 자신의 든든한 오디세우스였다.

이 일 때문에 그녀는 그레이셔스와도 이야기해 보았다. “가끔은 남자들에게도 똑바로 말해 줘야 해.” 그레이셔스가 그렇게 말했다. 스테드패스트가 이렇게까지 답답한 사람일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한번 해 보자. 다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아름은 시커의 손을 잡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난롯가 앞에 앉은 뒤 그의 손을 잡아 자기 곁으로 끌어당겼다.

“시커, 저는 당신을 온 마음으로 사랑해요. 당신의 아내가 될 거예요.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 영원히.” 그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레이셔스 말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레이셔스가 스테드패스트에게 이렇게 말하는 모습은 여전히 상상되지 않았다. 시커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아름도 행복했다.

하지만 이내 익숙한 슬픔이 다시 밀려왔다. 어떻게 해야 그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녀는 이 문제로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시커가 바라는 것은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녀는 언제까지나 그를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은… 닿을 수 없는 꿈이었다.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는 있지 않을까. 시커는 늘 그랬다. 언제나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시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잘못된 사람에게 청혼하고 있어요. 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당신과 결혼하게 될 거라는 걸요. 처음 샌드위치를 만들어 드렸던 그날부터요. 우리 부모님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저는 부모님의 허락 없이는 당신과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신도 알잖아요.” 됐다. 이번에는 정말 말로 했다. 분명하게.

시커는 웃었다. 방금 그녀가 한 말을… 정말 들은 걸까?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결국 저를 좋아하게 되실 거예요.”

아름은 그의 눈을 깊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한숨을 내쉰 뒤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난롯불은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의심은, 마침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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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ear in the Coat

8월 19, 2026 by K. Blackthorn

다음 날 아침, 아름은 가장 수수한 드레스를 골라 입었다. 향수도 뿌리지 않았다. 머리를 명랑 양처럼 헝클어진 채 둘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시커는 그녀의 곱슬머리를 좋아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게 해 주자. 모든 것이 끝나면 킨드를 찾아가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이것도 또 하나의 이기심이었다.

그녀는 아침 내내 어디에서 그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곳. 자신에게도 아무 의미 없는 곳. 하지만 그런 곳은 차마 떠올릴 수 없었다.

그녀는 접시 하나를 꺼내 놓고, 그 옆에 하나를 더 놓았다. 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아침 식사. 그녀의 마지막 이기심이었다. 시커가 문간에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든든했고, 굳게 마음을 다잡은 모습이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슬픈 소년이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그러면 조금은 쉬울 것이다. 그녀의 가슴은 그를 향한 사랑으로 저려 왔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적어도 이 모습만은 기억 속에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시커는 접시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저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문을 나서 탑을 향해 걸어갔다. 안 돼. 거기는 안 돼. 아름은 그의 손을 붙잡아 다른 길로 이끌었다. 탑에서 멀리. 계단에서도 멀리. 그리고 시냇가에서는 더더욱 멀리.

시커의 손이 잠시 머뭇거렸다. 아주 잠깐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그녀를 따라왔다. 두 사람은 밀밭을 지나갔다. 처음 서로에게 미소 지었던 그곳. 아니. 여기도 안 돼. 좁은 길 건너편에는 버려진 농가가 있었다. 여기다. 무너진 울타리. 잡초가 뒤덮은 땅. 마치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못하는 말들 같았다.

“시커… 이제 이건 안 돼요. 떠나세요. 저를 잊고 행복하게 사세요.”

끝났다.

아름답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이었다.

시커는 얼음처럼 차갑고 강철처럼 단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나도 당신은 필요 없어요. 사랑하지도—”

아름은 숨을 들이마시며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그리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크게. 처절하게. 멈출 수 없을 만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사라졌다.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시커의 팔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강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울지 마요, 아름. 당신은 괜찮을 거예요. 당신을 사랑해 줄 남자는 세상에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동정이 없었다.

오직 냉정함뿐이었다.

아름은 잠시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 고통마저도…

간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커는 그녀를 조용히 밀어냈다.

“안녕히.”

그는 그렇게 마지막이라는 듯 등을 돌렸다.

아름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찔레 가시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제야 혹독한 1월의 추위가 피부에 와 닿았다. 가시 하나가 시커의 낡은 재킷에 걸려 거칠게 찢어졌다. 그녀는 그가 몸을 떠는 모습을 보았다.

자기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소년을 남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그 소년의 마음을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

이 안에는 간직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

바로잡아야 했다.

그 순간 그녀는 떠올렸다.

몰래 만들어 두었던 재킷을.

“시커… 시커, 잠깐만요…”

그녀가 애원하며 그를 불렀다.

“당신이 그렇게 추워하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어요.”

“제발, 시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였다.

“떠나기 전에…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시커는 난롯가에 앉아 있었다. 나무잔이 손안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향신료를 넣은 따뜻한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름이 위층으로 올라가기 전 따라 준 것이었다.

그에게는 몇 시간이 있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을 시간. 그녀가 바라던 남자가 될 시간. 그녀를 속일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녀는 남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는 방금 했던 잔인한 말들을 떠올릴 때마다 자기 혀를 잘라 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와 함께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가진 힘을 모두 끌어모아야 했다.

아름이 외투를 품에 안고 내려왔다.

“이거… 당신 드리려고 만들었어요.”

외투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바느질은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고 반듯하게 되어 있었다. 마치 그의 몸을 재기라도 한 듯 꼭 맞았다. 아름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입어 볼래요?” 그녀가 다정하게 물었다. “얼어붙은 계단식 폭포를 보러 가요. 정말 아름답다고 들었어요.”

장난기 어린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졌다.

그녀는 문을 향해 달려가며 뒤돌아 외쳤다.

“빨리 와요! 느림보!”

마치…

그날 아침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커는 끝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백만 년이 지나도.

그래도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다시는 그녀를 놓지 않겠다고.

영원히.


며칠은 몇 주가 되었고, 몇 주는 몇 달이 되었다. 마침내 해석자의 영역에도 다시 봄이 찾아왔다. 시커와 아름은 언제나 함께였고, 단 한 번도 서로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가끔 시커는 아름에게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혼했다. 어떤 날은 그녀도 “네.”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하루가 끝날 무렵이면 그 대답은 언제나 “아니요.“로 바뀌었고, 그녀의 눈에는 다시 조용한 슬픔이 찾아왔다.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 거친 말이 오가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두 사람의 사랑과 헌신은 날마다 더욱 깊어졌다. 아름은 일곱 개의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단 한 번도 손가락에서 빼지 않았다. 그리고 시커에게 아름은 여전히,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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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in the Dream

8월 12, 2026 by K. Blackthorn

시커는 아름이 방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내려오지 않았다. 오늘 밤에는 꿈에서라도 나를 만나 줄까? 그녀는 나타났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현실에서는 겨울이 찾아왔는데, 꿈속에는 아직도 가을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붉은빛과 황금빛, 주황빛 잎들이 가지마다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색들은 어딘가 바래 보였다. 빛을 잃은 듯했다. 새는 한 마리도 노래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함께 모든 장소를 찾아갔다. 시냇가도, 폭포도, 과수원도…. 하지만 무언가가 사라져 있었다. 모든 발걸음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설렘도 없고, 불꽃도 없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뜨겁고 아픈 통증만 남아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해. 시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마침내 아름이 그를 바라보았다.

“시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드디어. 그녀는 자신을 사랑한다. 그것만은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잘못되어 있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말해 주려는 걸까. 그는 다시 모든 일을 머릿속으로 되짚어 보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뭘 놓친 거지?

“하지만 여기서는 안 돼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는…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없어요.”

시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가… 나를 떠나려는 거야. 그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붙잡고 싶었다.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혼자였다.

***

아름은 이미 마음을 정했다. 킨드의 말이 아직도 가슴속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녀는 이기적이었다. 시커의 사랑을 너무도 간절히, 욕심껏 원하면서도, 자신은 그의 사랑에 온전히 응답할 수 없었다. 아직은. 어쩌면 영원히. 시커는 더 나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아름다운 순례자들은 많았다. 자신보다 훨씬 더 그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여자들도.

그래서 그날 밤에도 그녀는 그의 꿈을 찾아갔다. 함께하는 한순간 한순간을 오래 붙잡아 두고 싶었다. 시간을 늘려 놓고 싶었다. 그의 눈빛도, 웃음도, 모든 순간을 기억 속에 새겨 두고 싶었다. 하지만 죄책감이 그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차라리 자신이 잔인해지자. 그가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자. 그러면 그는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홀로 그 사랑을 품고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어떨까. 다른 여자와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아니. 그것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너무 괴로웠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름은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여기는 안 돼.

이곳은 안 돼.

우리의 꿈은 안 돼.

이곳만큼은 손대지 않은 채 남겨 두어야 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으로. 울 수 있는 곳으로. 또다시 죄책감이 밀려왔다. 또 자기 생각뿐이었다. 여전히 시커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필요했다.

내일.

그녀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내일은… 말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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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anishing Spark

8월 6, 2026 by K. Blackthorn

시커는 가만히 누워 있었다. 다이아몬드 무늬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그의 피부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잠시 동안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지난밤, 그는 아름을 꿈에서 만나지 못했다. 밀밭에서 그녀를 만난 이후, 함께 같은 꿈을 꾸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름이 시냇가에서 자신을 기다렸을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해해 줄 거야. 아름은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는 서둘러 공동 거실로 내려갔다. 아직 아름은 와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접시를 꺼내 놓고, 그 옆에 하나를 더 놓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아름이 문간에 서 있었다. 자세는 여전히 우아했고 어깨도 곧게 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울었던 것이다.

아름은 조용히 걸어와 그의 곁에 앉았다. 그녀의 손이 그의 손을 찾아왔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하지만 그 손끝에서는 슬픔이 전해져 왔다. 시커는 처음 밀밭에서 만났던 날에도 그녀의 슬픔을 느꼈었다. 그러나 이번은 전혀 달랐다.

“아름, 미안해요.” 시커가 다급히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얼마나 오래…”

아름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시커… 나는… 난…”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지더니 흐느낌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더 조용했고, 더 가슴 아팠다.

“시커…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그 말은 뺨을 맞은 것처럼 시커를 내리쳤다.

“뭐라고요? 왜요?” 상처가 그의 목소리를 밀어 올렸다. “우리는 행복했잖아요. 정말 행복했잖아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제가 뭘 잘못했어요?”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가 왜 어젯밤 오지 않았는지 묻지도 않았어요. 일부러 안 간 게 아니었는데!”

아름의 눈에 번개가 번쩍였다. 아름답고도 날카로운 번개였다.

“잘 들어요, 시커.”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걸 말로 설명하려고 하지 말아요. 내 마음을 느껴 봐요. 당신은 내 마음을 느끼는 법부터 배워야 해요.”

눈속의 불꽃은 나타났던 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다. 그녀는 몸을 기울여 그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춘 뒤, 그의 손을 조용히 잡아끌었다.

“가요.” 그녀가 속삭였다. “킨드의 가르침에 늦으면 안 되잖아요.”

그녀의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시커의 시선이 그 반지에 머물렀다.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좁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지금 곁에 있는 아름은 그가 알던 아름이 아니었다. 먼저 달려가며 자신을 놀리려 하지도 않았다. 마치 마음이 전혀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 같았다. 걸음에도 생기가 없었다.

“빨리 와요, 느림보.”

시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 특유의 번개 같은 눈빛조차.

시커는 괴로웠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안아 주고 싶었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상황은 더 나빠지는 것만 같았다.

목초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안도했다. 아직 킨드는 가르침을 시작하지 않은 참이었다. 시커는 뒤쪽 자리를 골랐다. 아름은 그의 곁에 앉아 조용히 몸을 기대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커는 탑에서 옛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웠지만, 아름만큼은 영영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천 년이 지나도 말이다. 그녀는 그의 팔을 너무 세게 붙잡고 있었다. 아플 정도였다. 그래도 그는 팔을 빼지 않았다.

킨드는 책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든 다툼이나 헛된 영광을 위해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자기를 남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아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킨드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이 그의 어깨에 기댄 채 가슴을 가볍게 들썩이는 것이 시커에게 느껴졌다. 킨드가 왕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그녀는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킨드가 말했다.

“온유함은 자신을 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이 끝나자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그 어색한 거리가 스며들었다. 그들은 점심을 함께 먹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커, 피곤해요.” 아름이 조용히 말했다. “잠깐 방에서 쉬고 올게요.”

두 사람은 그녀의 방 앞에 멈춰 섰다.

시커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아름, 사랑해요. 온 마음을 다해서.”

“저도요.”

그녀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시커는 몸을 기울여 입을 맞추려 했다.

아름은 살며시 고개를 돌려,

대신 볼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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