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은 그날 아침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그녀는 쿵쿵거리며 공동실로 내려갔다. 늘 그렇듯 이야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그게 싫었다. 좋다. 오늘은 모험을 떠날 것이다. 필요하다면 혼자서라도.
늘 먹던 빵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명랑 양이 고기와 치즈를 남겨 두었다. 마치 아름에게 계획이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아름은 빵 두 장 사이에 고기 한 장, 치즈 한 장을 턱 집어넣었다.
남편 것 하나도 만들어.
아름은 홱 돌아보았다.
누가 말했지?
아무도 없었다.
그냥 자기 머릿속이었다. 또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분명 너무 심심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새 두 번째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었다.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그것마저 정성껏 천으로 감쌌다.
새들이 먹겠지.
여기서 친구라고는 새들뿐이니까.
뭐… 새들 말고도 그레이셔스. 그리고 스테드패스트. 킨드. 페어-글랜스. 그리고—
아름은 밀밭 사이를 거닐며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개울?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계단은 끔찍하게 길어 보였다.
새들이 노래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 노래에 맞춰 손가락으로 밀 이삭을 톡톡 두드렸다. 새들이 멈추면 그녀도 멈췄다. 이삭을 하나 뽑아 박자 사이에 휙 던져 버렸다.
그래도 심심했다.
그때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았다.
저 사람은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고 있는 거지?
그녀는 돌아보았다. 머리카락이 얼굴 앞으로 휘날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자기에게 웃고 있다는 것을.
그는 계속 웃고 있었다.
이건 좀 어색해지고 있었다.
아름은 곧장 걸어가 그의 배를 콕 찔렀다.
남편.
그 단어가 막을 새도 없이 머릿속을 가로질렀다.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전 아름이에요.”
대체 부모님은 왜 자기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
“네, 정말 아름다우세요!”
그가 말했다.
놀리는 건가?
아름은 킥 웃어 버렸다.
그녀는 벌써 그의 유머 감각이 마음에 들었다.
“개울 보러 갈래요?” 그가 물었다. “내일이라도?”
도대체 무슨 문제지?
자기가 오늘 심심하다는 걸 모르는 걸까?
그는 오늘 모험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가 폐허를 돌아다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뭐… 동행인이 떠난 뒤에.
그전에는 길 잃은 강아지처럼 동행인만 졸졸 따라다녔지만.
내일?
아마 계단을 못 내려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 뿐.
좋다.
보여 주겠다.
“오늘은 뭐가 문제죠?”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같이 갈 것이다.
좋든 싫든.
“따라와 봐요!”

아름은 계단 꼭대기에서 속도를 늦추었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뒤처지는 시커를 보며 씨익 웃음이 났다. 다음번에는 자기를 얕보지 않을 것이다.
맨 위 계단은 미끄러웠다. 발이 갑자기 미끄러지며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녀는 허우적거리며 손을 뻗어 아무거나 붙잡으려 했다. 그가 그녀를 붙잡았다. 아름은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말 아래까지 한참이었다.
그는 보기보다 힘이 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손을 잡는 방식이 그랬다. 너무나 다정했다.
아름은 손을 빼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좋았다.
물론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손을 잡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고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
애도 아니고.
그의 든든한 손 덕분에 발걸음이 한결 안정되자, 아름은 비로소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이런 계곡은 처음이었다. 푸르고 야생적이었다. 폭포는 힘차게 쏟아져 내렸고, 물은 가느다란 층계를 따라 흘러내렸다. 맑고 자유롭게 바위 위를 춤추며 흘러갔다.
아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모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름은 시커와 나란히 개울가에 앉아 수정처럼 맑은 물에 발끝을 담갔다. 시커. 이름이 그랬던가?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동행인이 그렇게 부르는 걸 들은 것 같았다.
개울 건너편에는 장엄하고 웅장한 궁전이 우뚝 서 있었다. 저곳을 탐험한다면 정말 멋진 모험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가 보자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 자기가 개울을 건너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물에 빠질 거라고.
솔직히 말하면, 계단에서 거의 굴러떨어질 뻔했던 걸 생각하면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그는 늘 오두막 근처 폐허를 탐험하고 있었다.
대체 거기 뭐가 있길래 저렇게 관심을 갖는 걸까?
알아낼 것이다.
내일.
누가 오늘로 모험이 끝나야 한다고 정했단 말인가?
아름은 가방을 내려놓고 열었다. 그 낡고 헤진 모습이 시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면서.
안에는 천으로 곱게 감싼 샌드위치 두 개가 들어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철렁했다.
남편 것 하나도 만들어.
설마 그 말을 정말 입 밖으로 내뱉은 건 아니겠지?
너무 창피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제발 못 들었기를.
그러면 분명 자기를 바보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모험도 끝이다.
남편.
그 단어는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사실 자기 이상형도 아니었다.
시커가 물통을 건네주었다.
아름은 그것을 알아보았다.
동행인의 것이었다.
그녀도 저런 좋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커 입가에 붙은 빵 부스러기가 자꾸 눈에 거슬렸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그것을 닦아 주었다.
훨씬 나았다.
그는 어딘가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름은 자신이 절망의 수렁에 빠졌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이제 그는 자기를 덜렁거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궁전도 끝이었다.
그런데 그는 듣고 있었다.
정말로 듣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판단이나 비난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계속 이야기했다.
계속 떠들어 댔다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두운 땅에서의 어린 시절.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에겐 사람을 믿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분하고.
조용하고.
든든한 무언가가.
아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았다.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
순간 가슴속에서 거부감이 치밀어 올랐다.
“울지 마요.”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녀는 남자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소리치는 건 봤다.
화를 내는 것도.
하지만 우는 것?
한 번도.
“우는 건 애기들이나 하는 거예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그는 자기 때문에 울고 있었다.
그건 약함이 아니었다.
그를 비웃을 이유도 없었다.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어떻게 방금 한 말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까?
애기.
그 말은 다정한 뜻일 수도 있었다.
사랑스러운 뜻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시커도 그렇게 받아들일지 모른다.
“앞으로는 애기라고 부를 거예요!”
그녀는 거의 스스로를 설득할 뻔했다.
“서둘러요, 애기! 해가 지고 있잖아요!”
아름은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자기가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는 걸 보여 줄 차례였다.

“키스해도 될까요?”
그 말에 아름은 순간 당황했다.
계단 꼭대기에서는 그의 손을 놓게 했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했다.
강하고.
조심스럽고.
다정했던 손.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입 맞추기를 원했다.
그런 사람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와 한 약속이 있었다.
단 한 사람에게만 입 맞추겠다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만.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도 그 사람에게만 하겠다고.
한 번 그 말을 하고 나면, 다시는 다른 누구에게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남편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정말 멋진 하루였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첫날일 뿐이었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그녀는 단 한 사람에게만 입 맞추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아름은 시커에게 뺨을 내밀었다.
그가 다른 여자들에게 입 맞춘 적이 있다면, 그건 그의 일이었다.
그의 입술이 피부에 닿은 자리에서 간질거림이 퍼져 나갔다.
“보고 싶을 거예요.”
시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뇨, 안 그럴걸요.”
아름은 빙긋 웃었다.
“내가 꿈에 찾아갈 거니까요.”
그리고 그 바보 같은 소년은 정말로 그 말을 믿었다.

아름이 눈을 떴을 때도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은빛 기운이 희미하게 지평선 끝을 스치고 있었다.
그녀는 촛불을 밝히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빗어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하룻밤만 자도 머리가 명랑 양만큼 엉망이 되다니.
뭐…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같은 옷을 또 입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진 옷도 별로 없었다.
시커에게 잘 보이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폐허를 탐험하기에 적당한 옷이 필요했을 뿐이다.
시커는 보통 언제 아침을 먹을까?
잘 모르겠다.
혹시 모르니 일찍 가는 편이 좋겠다.
그녀는 식기를 두 개 꺼내 놓았다.
하나는 자기 것.
그리고 바로 옆에는 하나 더.
기다리는 동안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접시가 두 개?
자기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시커가 보면 자기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바로 알 것이다.
아름은 황급히 접시 하나를 치우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시커가 문간에 나타났다.
“좋은 아침이에요, 애기.”
그녀는 애써 두 번째 접시를 보지 않으려 했다.
대신 하루 묵은 빵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사과는 아니지만, 이걸로 만족해야겠네요.”
혼자만 아는 농담이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시커는 두 번째 접시 앞에 앉았다.
그러니까—
눈치챘다는 뜻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향해 움직였다.
“여기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요!”
어쩌면 그냥 놔둬도 되었을지 모른다.
꿈속에서 그의 손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아직도 기억나니까.
하지만 결국 그녀는 손을 빼 버렸다.
“시커, 그 탑에서 대체 뭘 하는 거예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너무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너무 궁금해하는 티가 났다.
분명 수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역시나 그도 눈치챘다.
당연히 그랬다.
자기가 전에부터 그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방금 흘려버렸으니까.
아름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다들 알아요, 우리 애기.”
그녀는 일부러 우리를 넣었다.
애기라는 말이 너무 다정하게 들리지 않도록.
“그럼 와서 봐요, 애기.”
시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감히 자기를 애기라고 부르다니.
“저를 애기라고 부르지 마요!”

아름은 작은 모험이 시작되기도 전에 너무 들뜬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앞장서는 건 시커에게 맡겼다.
그도 그게 좋은 모양이었다.
“여기가 먼지 낀 응접실이에요.”
시커가 말했다.
그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둘은 무너진 돌무더기에 막힌 문 앞에 도착했다.
“해석자는 저 너머 방들에서 크리스천에게 많은 것들을 보여 주었죠.”
그가 말했다.
자기가 이 폐허의 역사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가끔은 정말 얄미울 정도였다.
“그리고 크리스티아나에게도요.”
아름이 덧붙였다.
시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좋았다.
그가 모르는 걸 자기는 알고 있었다.
저녁이 지나면 보여 줄 것이다.
“여기서 안내는 끝이에요.”
시커는 자기 키보다도 낮은 무너진 벽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 끝이라고?
좋은 것은 언제나 노력이 필요한 법인데.
그는 그것도 모르는 걸까?
좋다.
보여 주겠다.
아름은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힘들었다.
팔에 힘이 들어가고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
그래도 도움을 청할 생각은 없었다.
절대로.
그녀는 반대편으로 내려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올 거죠, 우리 애기?”
그녀는 씨익 웃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보여 줬을 것이다.
“애기라고 부르지 마…”
시커가 말하다 말았다.
아름은 킥킥 웃었다.
끝까지 말도 못 하는구나.
그녀는 탑 문이 있는 계단까지 냅다 달려갔다.
잠겨 있었다.
설마 이게 끝인가?
모험이 벌써 끝났다고?
그녀는 문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무 빨랐다.
아직 끝날 수는 없었다.
시커는 언제나처럼 태연하게 걸어왔다.
그리고 배낭에서 주머니칼을 꺼내더니 딸깍 소리와 함께 펼쳤다.
처음 보는 칼이었다.
그건 확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꿈속에서는 그가 이미 자신에게 보여 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그는 칼을 문틈 사이에 밀어 넣었다.
마치 천 번도 넘게 해 본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아름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자기가 모르는 모습이 얼마나 더 있는 걸까?
그녀는 손을 내밀고 기다렸다.
그런데 시커는 이미 자기 혼자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데요…”
아름이 말했다.
정말 눈치가 없었다.
손을 잡고 싶은 건지 아닌 건지.
시커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손이 자연스럽게 맞닿았다.
손을 맞잡은 채 둘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은 생각보다 훨씬 좁았다.
아름은 거의 그의 등에 기대다시피 해야 했다.
그래도 손은 놓지 않았다.
그의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천천히.
규칙적으로.
그리고 강하게.
그 울림이 그녀의 몸으로 전해졌다.
이상하게도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심장도 그에 답하듯 뛰었다.
한 박자도 어긋나지 않게.
도대체 탑 꼭대기에 무엇이 있길래 저토록 집착하는 걸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책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사이자 시인이었던 건가?
어쩌면 정말 자기 취향일지도 몰랐다.
말도 안 돼.
요 며칠 자신은 완전히 이상해져 있었다.
아름은 책등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었다.
『한 사람의 척도』
『숨겨진 샘』
『멍에와 쟁기』
정말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러다 한 권이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로 적혀 있었다.
“이건 뭐예요?”
그녀가 물었다.
“신약성경이에요.”
시커가 대답했다.
“그리스어로 쓰여 있죠.”
전사이자 시인.
마치 오디세우스처럼.
물론 그리스어도 읽을 줄 알겠지.
하지만 확인해 봐야 했다.
“그럼…”
아름은 반 박자쯤 머뭇거리다가 불쑥 물었다.
“‘사랑해’는 어떻게 말해요?”
그건 괜찮았다.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 바보 같은 소년은 말했다.
“아가파오.”
그가 말했다.
그리고 아름은 그 말을 듣는 것이 좋았다.
누군가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해 준 건 처음이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속으로 킥 웃었다.
점점 능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시커에게만큼은.

그날 밤, 아름은 다시 꿈속에서 시커를 찾아갔다.
이번에는 일부러.
시커는 이미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당신이네요?”
아름이 나직이 속삭였다.
시커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지켰군요.”
아름은 망설임도 없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바로 오두막 앞에서.
여기는 꿈이었다.
그들의 꿈.
그들의 규칙.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여기서는 손 잡아도 돼요.”
그녀는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
“여기 말고는 안 되고요.”
시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계단을 따라 계곡 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아름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그녀는 미끄러질 걱정도 없이 개울을 건넜다.
바위에서 바위로 가볍게 뛰어다녔다.
웅장한 궁전이 곁에 우뚝 솟아 있었지만 그녀는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래된 궁전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녀에게는 오디세우스가 있었다.
둘은 계곡을 따라 걸었다.
개울은 옆에서 장난치듯 튀어 오르며 함께 흘렀다.
시커는 매끈한 바위 위에 털썩 앉아 발을 물속에 담갔다.
그리고 웃으며 손짓했다.
“이것도 해 봐요!”
아름은 망설임 없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치마도 신발도 신경 쓰지 않았다.
빛나는 물은 시원했다.
밝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했다.
물은 바람처럼 그녀를 감싸며 흘렀다.
손가락 사이로.
발목 주위로.
하지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아름은 웃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둘은 폭포 아래에서 함께 춤을 추었다.
주변의 물은 부드럽고 살아 있었으며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침내 아름은 시커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기대었다.
단단했다.
든든했다.
따뜻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밤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원히.
하지만 결국 헤어질 시간이 찾아왔다.
시커가 몸을 기울였다.
입맞춤하려고.
이건 그녀의 꿈이었다.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진짜이기도 했다.
중요했다.
의미가 있었다.
아름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술을 마주하는 대신—
조용히 뺨을 내주었다.

아름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해는 이미 하늘 중턱까지 올라와 있었다.
애기처럼 푹 자 버렸다.
그 순간 공포가 밀려왔다.
시커가 뭐라고 생각할까?
그녀는 허둥지둥 머리를 빗었다.
얼굴에는 물을 끼얹었다.
공동실은 비어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름은 목초지로 냅다 달려갔다.
거기에 시커가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킨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름은 킨드의 눈빛에서 꾸밈없는 호감을 읽을 수 있었다.
킨드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나쁜 사람일 리 없지.
그렇지?
킨드는 늦었다고 그녀를 놀렸다.
공정한 지적이었다.
아름은 원래 시간 감각이 형편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자기 잘못이 아니었다.
“앞으로는 그렇게 밤새도록 저를 붙잡아 두면 안 돼요.”
아름은 시커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뺨이 뜨거워졌다.
제발 킨드가 못 들었기를.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낮에는 함께 있잖아요. 그거면 충분하죠.”
하지만 나한텐 충분하지 않은데.
그 말은 현명하게 삼켰다.
방금 킨드가 두 사람을 왕자님의 탄생 축하 행사에 초대한 건가?
아름은 말없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킨드는 미소를 지었다.
“아름도 시커도 언제든 내 천막에 놀러 와도 돼.”
그가 말했다.
“둘 다 말이야.”
그는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름이 고개를 돌리자 그레이셔스가 웃고 있었다.
시커가 무슨 말을 한 모양이었다.
동행인이 분명 나쁜 영향을 끼친 게 틀림없었다.

마침내 크리스마스 전날이 찾아왔다.
아름은 손꼽아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음악 상자를 좋아할까?
그녀는 들키지 않으면서도 그의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가끔 시커는 정말 뻔한 것도 놓치곤 했다.
물론 그는 음악 상자를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아름도 새 손가방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분명 예전 가방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그녀의 전사 시인은 장인이기도 했다.
대체 언제쯤 그녀를 놀라게 하는 걸 멈출까?
아름은 킨드의 가족과 함께한 저녁 식사가 무척 좋았다.
예배도 좋았다.
그 여운은 아직도 마음을 따뜻하게 밝히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시커와 함께 크리스마스 별 아래 앉아 있었다.
모닥불은 거의 꺼져 가고 있었고, 희미한 숯불만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완벽한 밤이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름은 입술에 닿는 감촉에 잠에서 깨어났다.
시커의 입술이었다.
그건 계산에 넣지 않아도 됐다.
먼저 키스한 건 시커였으니까.
아니.
그녀도 원하고 있었다.
아름은 몸을 기울여 부드럽고 확신에 찬 입맞춤으로 답했다.
그건 계산에 들어갔다.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 입을 맞췄을 때—
이번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