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혹은 시커를 새로 들어온 일꾼들에게 소개했다. 수레를 싣고 내리는 사람들, 답차를 돌리는 사람들. 앞으로는 그들에게 씨 뿌리는 법과 추수하는 법을 가르치고, 겨울이 오면 나무 베는 일도 맡겨야 했다. 하지만 그의 짐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도록 챙기느라 근무 시간은 더 길어졌고, 대부분의 날은 해가 완전히 진 뒤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슬기가 잠든 뒤면 아름은 가끔 조용히 울었다. 아이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밤에는 모험 이야기와 연애 소설 속으로 파고들었다. 시커에게도 책이 있었다. 두껍고 진지한 책들이었다. 그는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고, 아름은 졸린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와 그만 자러 오라고 애원하곤 했다. 시커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책을 읽었다.
슬기는 쑥쑥 자라고 있었다. 이제는 혼자 앉을 수도 있었고, 사 준 장난감들을 손으로 툭툭 치며 놀기도 했다. 시커는 그 모든 순간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일하는 동안 흘려보내고 있었다.
매혹은 일주일에 한 번씩 품삯을 가져다주었다. 예전 안락이 하던 것처럼. 어느 날 아름이 “월급은 얼마나 올랐어?” 하고 묻자 시커는 잠시 멍해졌다. 야발과 이야기할 때는 그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분명 예전보다 많아지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늘 남는 돈은 없었다.
가끔 매혹은 야발의 지시를 전하러 집에 들르곤 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돌아가고 나면 정향과 오렌지 향기가 은은하게 집 안에 남았고, 시커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초록빛 눈을 떠올리곤 했다. 그녀에게는 무언가 반짝이는 생기가 있었다. 아름에게서 잃어버린 바로 그 빛. 아니. 시커는 그 생각을 억눌렀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아들이 있었다. 그런 생각은 품어서는 안 되었다.
아름은 그 못생긴 소파에 누워 시커가 슬기와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심했다. 그리고 여전히 피곤했다.
시커는 바닥에 앉아 슬기와 마주했다. 손가락 끝으로 슬기의 아랫입술을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혀 내밀어 봐.” 슬기가 조그만 혀를 쏙 내밀었다. “에에엑!” 시커가 장난스럽게 외치며 혀를 톡 건드리자 슬기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이유 없이 우는 법이 없었다. 슬기가 외로움을 달래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외로움은 더 깊어졌다. 이곳 사람들은 냉정했다.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슬기에게도 그랬다. 슬기를 품에 안고 마을을 돌아다녀도 진정한 친구는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 오두막에서는 모두가 슬기를 안아 보고 싶어 했을 것이다. 밝은 항구에서는 누구나 환하게 웃어 주었는데.
몇 번인가 시커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려 했지만, 시커는 이제 그녀의 눈물을 받아 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기에 시커와 결혼했다. 그런데 지금의 시커는 그저 지쳐 있었고… 화가 나 있었다.
시커는 슬기의 발을 잡았다. “이 새끼 돼지는…”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슬기는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마지막 발가락에 이르러 “집까지 쭈우욱 갔네!” 하고 외치자 슬기는 또 한 번 배를 잡고 웃었다.
하지만 슬기는 아름을 닮아 여리고 겁이 많았다. 시커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자 슬기의 아랫입술이 떨리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름은 얼른 슬기를 안아 가슴에 꼭 품고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슬기.”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 아빠는 그냥 하품하는 거야. 네 책에 나오는 곰처럼.” 슬기는 엄마의 심장 소리가 귓가에 닿자마자 금세 진정했고, 쇄골을 움켜쥐고 있던 작은 주먹도 스르르 풀렸다.
슬기가 아름의 품에서 꼼지락거리자 시커가 아이를 받아 머리에 입을 맞춘 뒤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빠는 이제 일하러 가야 해. 엄마랑 잘 놀고 있어. 금방 돌아올게.”
그는 아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외투를 걸친 뒤 도끼를 어깨에 메었다. 문을 나서기 전 한 번 뒤돌아보며 두 사람을 향해 미소 지었다.
문이 닫히자 작은 집은 갑자기 너무 넓게 느껴졌다.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탁탁 소리를 냈고, 바람은 덧문을 흔들며 웅얼거렸다.
“나 왔어.” 시커가 문을 밀어 닫으며 말했다. 그는 도끼를 문가에 세워 두고 장화를 벗은 뒤, 바닥에 흩어진 장난감과 책 사이를 조심스레 지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 있었다.
슬기는 아름의 무릎에 앉아 있었고, 아름은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고 있었다. “갈색 곰아, 갈색 곰아, 무엇이 보이니?” 정말 좋은 엄마였다. 어떤 날은 벌써 천 권은 읽어 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마지막 장을 넘기자 슬기의 고개가 꾸벅 떨어졌다. 시커는 아이를 안아 침실로 데려가 침대에 눕힌 뒤, 작은 파란 당나귀 인형을 팔 밑에 꼭 끼워 주었다.
“아, 시커.” 그가 다시 거실로 나오자 아름이 말했다. “여긴 정말 끔찍해.”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아름?”
아름은 눈을 굴리며 흉내 내듯 말했다. “‘애들끼리 언제 오후에 같이 놀게 해요.’”
“무슨 일 있었어?”
“다 빈말이었어. 오늘 슬기를 데리고 헌신의 집에 갔는데, 바쁘대.”
“정말 바빴던 거 아닐까?”
“문도 안 열어 주고 문간에 세워 둔 채 말했어. ‘미안해, 아름. 오늘은 좀 바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문은 끝까지 막고 서 있고, 나는 밖에 서 있고… 정말 창피했어.”
시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건 너무했다.”
“그게 제일 나쁜 부분도 아니야.”
“그래?”
아름이 한숨을 쉬었다. “무심도 그 집에 있었어. 안에서 애들이 같이 노는 소리가 다 들리더라. 결국… 나랑 슬기는 함께 놀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잖아.”
시커가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아름이 먼저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못 들은 척했어. ‘오늘은 너무 바빠서.’”
시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름를 품에 안고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아질 거야, 자기야.” 그가 말했다. 그 자신조차도 그 말을 믿지는 못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