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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rs of the Elect

Tears of the Elect

Archives for 9월 2026

A Year of Labor

9월 15, 2026 by K. Blackthorn

다음 날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시커는 아무리 피곤하거나 속이 메스꺼워도 억지로 밥을 먹는 법을 금세 배웠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날 일이 두 배는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하루 지난 빵은 값이 절반이었다. 겨우 동전 세 닢. 하지만 그 정도면 하루를 버틸 힘은 되었다. 가끔 안락이 점심때 샌드위치를 가져다주었고, 두 사람은 함께 앉아 식사를 했다.

그는 매일 시간을 세었다. 그리고 요일도.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그리고 주일이면 쉬었다. 책을 읽기도 했고, 가끔은 계곡 아래로 내려가 시냇가에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몇 달이 흘렀다. 몸은 점점 강해졌고, 일도 처음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그래도 늘 피곤했고, 온몸은 늘 쑤셨다. 옷은 점점 해졌고, 수염은 자라났으며, 무엇보다 그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그는 매일 밤 꿈속에서 아름을 만났다. 함께하는 순간 하나하나를, 입맞춤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늘 부족했다. 밤마다 그녀는 “사랑해요.” 하고 속삭였고, 그러면 그는 다시 눈을 떠 끝없이 이어질 발디딤 바퀴의 하루를 맞이해야 했다.

시커는 돈을 아주 신중하게 관리했다. 될 수 있는 한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금화 일곱 닢. 땅 계약금으로 꼭 필요한 돈이었다.

아름은 늘 그를 타일렀다. “맨날 그렇게 심각하게만 있지 말아요. 맛있는 것도 좀 사 먹고 그래요.” 그래서 그는 그녀를 기쁘게 해 주려고 가끔은 정말 그렇게 했다. 또 이따금 행상이 마을에 들러 책을 팔았다. 그 행상은 시커를 마음에 들어 해서 언제나 좋은 값에 책을 내주었다. 때로는 책 한 권을 사려고 한 끼를 거르기도 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행복했다.

가을이 겨울로 바뀌자 방앗간은 문을 닫았다. 시커는 위험의 숲 가장자리에서 나무를 했다. 어떤 것은 기쁨의 새집을 짓는 데 쓰였고, 어떤 것은 오래된 집들을 덥히는 장작이 되었다. 힘든 일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변화를 반겼다. 적어도 방앗간처럼 단조롭지는 않았다. 숲에서는 늑대 울음소리가 메아리쳤지만, 짐승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시커는 꿈속에서 아름과 함께 성탄절을 보냈고, 그녀의 생일도, 자신의 생일도 함께 보냈다. 성탄절은 이제 한 번만 더 혼자 보내면 된다. 그러면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

봄이 오자 그는 통역자의 영역에서 밭을 갈고, 손으로 씨앗을 뿌렸다.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 들판에서 아름를 처음 만났으니까. 그녀는 마치 오래전부터 거기에 있었던 사람처럼 밀밭 사이를 걷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 밀을 심고, 거두고, 맷돌에 갈아, 자기가 매일 먹는 빵을 만든다는 사실을 그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달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꿈도 조금씩 희미해졌다. 색채는 점점 바랬고,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으며, 얼굴도 점점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름의 초상화를 몇 시간씩 바라보며 그 선 하나하나를 기억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수확철이 찾아오자 그는 들판에서 곡식을 베었다. 한 문장이 계속 그의 머릿속을 맴돌며 마음을 괴롭혔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름이에요.” 바로 이곳이었을까? 그녀가 처음 그의 배를 콕 찌르며 웃었던 곳이. 저 멀리 통역자의 탑이 그를 부르고 있었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웃는 얼굴이 그려진 기쁨의 자루들이 곡식으로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짚단은 묶어야 했으며, 수레도 실어야 했다.

수확이 끝나자 그는 다시 방앗간으로 돌아갔다. 이제 일 자체는 힘들지 않았다. 그저 지루할 뿐이었다. 밀 냄새는 끊임없이 아름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꿈속에서는 이제 그녀의 향기마저 맡을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일 년이 흘렀다. 그는 한 주의 일을 마치고 안락에게 품삯을 받았다. 드디어 금화 일곱 닢이 모였다. 이제 그 땅은 그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앞으로 일 년만 더. 그러면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갈 집을 짓기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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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ead-wheel

9월 12, 2026 by K. Blackthorn

다음 날 아침, 안락은 시커를 작업반장에게 소개해 주었고, 그는 다리 건너편 방앗간으로 시커를 데려갔다.

“점심은 정오. 종이 울리면 일이 끝난다.” 작업반장이 말했다.

시커는 커다란 바퀴의 밀대 앞에 자리를 잡고 힘껏 밀기 시작했다. 보기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바퀴는 삐걱거리며 천천히 돌아갔다. 밀 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아름 생각이 절로 났다. 그는 바퀴가 도는 횟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열. 스물… 아흔. 아흔여덟. 아흔아홉. 백. 끝없이 원을 그리며 돌다 보니, 어느새 몇 바퀴를 돌았는지도 잊어버렸다.

곧 피로가 몰려왔다. 발바닥은 불이 나는 것 같았고, 허리는 쑤셔 왔다. 그래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몇 분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늘어졌다.

첫 번째 종이 울렸다. 그는 신음 소리를 내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근육들까지 모조리 쑤셔 왔다. 물통을 들어 길게 한 모금 들이켠 뒤 숨을 헐떡이며 물통을 내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인 것 같은데 점심시간이 끝나 있었다. 아직도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울고 싶었다. 우는 건 아기들이나 하는 거야.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이 눈물이라고 상상했다. 그래도 그는 계속 걸었다. 끝없이. 계속.

마침내 두 번째 종이 울렸다. 그 소리는 자비처럼 들렸다. 시커는 자기 방까지 걸어갈 힘이나 남아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방앗간을 나서자 안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시커의 손바닥 위에 은화 한 닢을 올려놓았다. “수고하셨어요.” 그녀가 말했다. “첫날이 제일 힘든 법이니까요.”

두 사람은 함께 마을로 돌아왔다. “곧 익숙해질 거예요. 약속해요.” 그녀가 말했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꼭 식사는 하세요.” 헤어지기 전, 그녀는 갓 구운 빵 한 덩이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하지만 시커는 그녀의 충고를 무시한 채, 죽은 사람처럼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다.

***

시커는 꿈속에서도 온몸이 쑤셨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하지만 아름을 보는 순간, 그 모든 고통은 충분히 감수할 만한 것이 되었다. 그는 다정하게 그녀에게 입을 맞춘 뒤 손을 내밀었다.

아름은 깜짝 놀라 숨을 삼키더니, 조심스레 그의 두 손을 자기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머, 시커…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예요?”

그의 두 손은 온통 물집투성이였다.

아름은 그의 손등과 손바닥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아이고, 우리 불쌍한 시커.” 그녀가 안타깝게 말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그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눈물이 닿는 곳마다 물집이 하나씩 사라졌다.

“많이 아파요?” 그녀가 물었다.

“조금.” 시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다 어깨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렸다.

“이리 와요.” 아름은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마을을 벗어나 무화과나무 아래 조용한 곳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먼저 앉더니 시커도 곁에 앉게 했다. 그리고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의 등을, 어깨를, 팔을, 다리를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마침내 그는 완전히 새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 정도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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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 of the Future

9월 12, 2026 by K. Blackthorn

그날 밤, 시커와 아름은 함께 바닷가에 앉아 파도가 발끝을 스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름은 어머니와 함께 장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시커는 새로 배정받은 방과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완벽한 곳을 찾았어. 우리 둘이 함께 살아갈 집을 지을 곳이야. 밖에 나란히 앉아 폭포를 바라볼 수 있을 거야.”

“시커, 난 당신과 함께만 있을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시커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다만…”

“응?” 아름이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집을 짓기 시작하려면 금화 열다섯 닢이 필요해. 하루 종일 계산해 봤는데… 사 년이야, 아름. 하루에 은화 한 닢씩 모아도 사 년은 걸려.”

“시커, 이건 당신이 원했던 일이잖아요. 오래 걸릴 거라는 건 우리도 알고 있었고요.”

“하루 종일 그것만 생각했어. 여긴 물가가 달라. 방세만 해도 한 달에 은화 여덟 닢이고, 빵 한 덩이도 동전 여섯 닢이나 해.” 그는 작게 웃었다. “명랑 양이 끓여 주던 스튜 한 그릇도 사 먹기 힘들겠더라.”

아름은 조용히 웃었다. 그녀의 눈빛이 꿈속을 환하게 밝혔다.

“하루 종일 생각해 봤어.” 그가 다시 말했다. “열심히만 하면 이 년으로 줄일 수 있을 것 같아. 쉽지는 않겠지만… 할 수 있어.”

아름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 들었어?”

그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라면 꼭 해낼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그냥… 너무 멀게만 느껴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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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ms of Service

9월 10, 2026 by K. Blackthorn

시커는 안락을 따라 마을 한가운데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우아했지만 사치스럽지는 않았다. 납테를 끼운 창문 사이로 자연광이 은은하게 스며들었고, 벽은 질 좋은 목재 판넬로 마감되어 있었다. 풍경화 한 점과 지구본, 책장이 조용한 권위를 더해 주었다. 한쪽 벽에는 푹신하지만 절제된 소파가 놓여 있었고, 커다란 원목 책상 앞에는 등받이가 높은 나무 의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책상 뒤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흰 머리카락과 품위 있는 자세에서는 오랜 세월과 깊은 지혜가 자연스레 느껴졌다.

“아버지,” 안락이 말했다. “이분은 시커예요. 오늘 막 오셨어요. 기쁨에 집을 짓는 일을 아버지께서 기꺼이 도와주실 거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는 고개를 들어 시커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엄숙했지만 눈빛만큼은 충분히 온화했다. “시커, 환영하네.”

“실례하겠습니다.” 안락이 말했다.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요.” 그녀는 가볍게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젊은 시커.” 촌장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기쁨까지 오게 되었는가?”

“선생님…” 시커가 입을 열자, 촌장이 그의 말을 막았다.

“살면서 여러 이름으로 불려 봤지만, ‘선생님’이라는 말은 처음이군.” 그가 미소를 지었다. “야발이라고 부르게.”

시커는 아름과 한 약속을 이야기했다. 그녀와 함께 살아갈 삶을 세우고 싶다는 소망을.

“아, 그렇군.” 야발이 말했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생명나무니라.’ 수천 년 전에 솔로몬 왕이 한 말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예전에는 이 마을 이름이 기갈이었네.” 그는 검은 바인더 하나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와 함께 걸어 보세.”

그는 시커를 데리고 마을 거리를 걸었다. “기쁨에서는 누구나 자기 몫을 다하고, 누구나 마땅한 보상을 받네.” 그는 아름다운 꽃밭이 있는 한 집을 가리켰다. “부지런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자네와 다를 바 없었네. 지금은 헌신과 함께 이런 삶을 일구었지.”

그들은 계속 걸었고, 야발은 다른 집들도 하나씩 가리키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일구어 왔는지 들려주었다.

마을 끝에 이르자 시커가 말했다. “맞아요. 여기예요! 안락을 처음 만난 곳이요. 절 도와주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야발은 들고 있던 바인더를 펼쳐 몇 장을 넘겼다. “그렇네.” 그가 말했다. “이 땅은 지금 매물로 나와 있네. 부지런의 땅이지만, 보다시피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지. 값은 금화 오십 닢이네. 아담한 집 하나 짓는 데는… 음, 백 닢이면 충분할 걸세. 계약금은 보통 십 퍼센트. 그러니 금화 열다섯 닢이면 공사를 시작할 수 있네.”

시커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돈이 없습니다.”

야발은 시커의 어깨에 손을 얹고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렇겠지.” 그가 말했다.

두 사람은 다시 야발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기쁨에서는 모두 왕의 일을 하네.” 그가 말했다. “모두가 일하고, 모두가 그에 맞는 보상을 받지. 내 딸들도 예외는 아니네. 자네가 나를 잘 섬기면, 곧 왕을 잘 섬기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 내 딸들도 자네를 성심껏 돌볼 걸세.”

“품삯은 하루에 은화 한 닢. 그게 이곳의 기준일세.” 그는 손을 내밀었고 시커는 악수를 했다. “일은 언제나 있네. 제분도 있고, 가을에는 수확도 하지. 겨울에는 나무도 해야 하고.” 야발은 주머니에서 금화 몇 닢을 꺼내더니 그중 하나를 시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시작하는 데 보탬이 되도록 특별히 주는 보너스일세.”

그때 맞은편에서 안락이 걸어오고 있었다. “딸아.” 야발이 말했다. “시커가 머물 곳이 필요하구나. 방으로 안내해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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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wn of Delight

9월 9, 2026 by K. Blackthorn

참으로 이상한 꿈이었다. 두 사람은 어린아이였고, 함께 바닷가를 거닐며 조개껍데기를 주웠다. 얕은 물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썰물 때 드러난 작은 섬까지 걸어갔다. 그는 모래 위에 아름의 이름을 썼고,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파도가 그 이름을 지워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집에 대한 계획을 말하는 걸 깜빡했지만… 괜찮았다. 오늘 밤에도 만날 테니까.

그는 오르골을 감아 마지막 음이 사라질 때까지 듣고는 조심스레 배낭에 넣었다. 아름의 초상화를 돌돌 말아 노끈으로 묶은 뒤 오르골 곁에 넣었다.

그는 탑으로 올라가 사람의 됨됨이와 멍에와 쟁기를 꺼내 에바의 속량과 자신의 책 옆에 나란히 넣었다. 배낭에는 그것이 전부였다. 내려오며 빗장을 조심스럽게 걸어 해석자의 서재 문을 다시 잠갔다.

마지막으로 친절의 가르침을 듣고, 명랑 양과 굳건한 이와 은혜로운 이, 그리고 물론 친절과 리오르나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러고는 좁은 길을 따라 길을 떠났다.

그는 시냇물 위의 작은 다리를 건너 구원의 언덕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백합꽃 사이에 앉아 계곡 건너 산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을 바라보았다. 평원을 가로질러 난 길은 계곡을 잇는 둥근 석조 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그 다리 너머에서 그는 아름과 함께 살아갈 삶을 준비할 것이다.

그는 언덕 반대편을 가볍게 내려갔다. 이곳은 지금까지 그가 와 본 가장 먼 곳이었다. 저 멀리 난관의 언덕이 솟아 있었다. 언덕이라고? 해석자의 영역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들보다도 훨씬 높이 치솟아 있었고, 정상은 구름 속에 숨어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는 작은 돌기념비 하나가 서 있었다. 세 사람의 해골과 뼈가 가지런히 매달려 있었고, 세월이 남김없이 살을 앗아가 버린 뒤였다.

여기 단순과 게으름과 방자함이 잠들다.
손은 게을렀고 마음은 비어 있었으니,
수고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자처럼 그들도 망하였다.

섬뜩한 경고였다. 기념비 아래에는 동전과 연장, 그리고 양피지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풍요를 구하는 기도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닿았다. 앞에는 갈림길이 있었다. 왼편은 파멸의 도시, 오른편은 위험의 숲이었다. 좁은 길은 여전히 곧게 이어져 굽이 하나 없이 난관의 언덕을 향해 뻗어 있었다. 끝없는 오르막이었다. 여기서는 정상조차 보이지 않았다.

곡물 저장탑들이 줄지어 선 곳에 이르자 길 위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창백한 석재와 세월에 빛바랜 목재로 지어진 탑에는 놋쇠 고리 달린 투입구와 쇠로 만든 배출구가 달려 있었다. 모든 탑에는 햇살 속 밀 이삭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가까이에는 천막을 씌운 수레들이 멈춰 서 있었고, 얕은 홈이 새겨진 둥근 표식이 찍힌 자루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길이 살짝 솟은 둔덕 아래에는 방앗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목재 벽, 오래된 동전처럼 빛나는 구리 기와지붕, 그리고 거대한 물레가 눈에 들어왔다. 삐걱거리는 나무 소리와 맷돌이 돌아가는 소리, 밧줄과 도르래가 끼익거리는 소리가 낮은 기계음과 겹쳐 들려왔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석조 아치다리는 수레 한 대가 지나갈 만큼 넓었지만 난간도 문도 없었다. 오랜 세월 수많은 발길에 닳아 하얗게 반들거린 다리는 마치 계곡 바위와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숲에서 흘러온 시냇물은 다리 아래를 지나 나무들 사이로 폭포처럼 떨어졌고, 물소리가 계곡을 가득 메웠다. 오른편에서는 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떨어져, 자신과 아름이 꿈속에서 수없이 함께 춤추었던 바로 그 폭포로 이어지고 있었다.

마을은 부드러운 황금빛에 물들어 있었다. 조약돌 길은 언덕을 따라 완만하게 휘어졌고, 옅은 회반죽 벽과 붉은 기와지붕을 얹은 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창문마다 화분이 걸려 있었고, 보이지 않는 빵집에서 갓 구운 빵 냄새가 따뜻하게 흘러나왔다. 가까운 종탑에서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마을을 천천히 걸으며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정원과 계단식 화단에는 라벤더와 세이지, 장미가 만발해 담장을 따라 아름답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을 끝에는 작은 집 하나를 짓기에 꼭 알맞은 빈터가 있었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시냇물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멋진 풍경이지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기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녀는 젊고 눈부셨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에 볼에는 살짝 살이 올라 있었고, 푸른 눈동자에서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평온함이 흘러나왔다.

“네. 정말 그렇네요.” 시커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저는 시커입니다.”

“저는 안락이에요.”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원하신다면… 이곳은 당신 것이 될 수도 있어요.”

“신부를 위한 집을 짓고 싶습니다.” 시커가 말했다. “그리고 이곳은… 완벽한 것 같습니다.” 그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다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를 찾아가 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분명 길을 찾아 주실 거예요. 게다가 늘 일손이 필요하시거든요.” 그녀는 마을 중앙을 가리켰다. “마을 회관이에요. 찾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가 촌장이세요.”

“감사합니다.” 시커가 말했다.

“아, 그리고…” 그녀가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겉모습이 좀 무뚝뚝하다고 너무 신경 쓰지는 마세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따뜻한 분이시거든요.” 그녀는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소개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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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ly Girl

9월 9, 2026 by K. Blackthorn

시커는 다시 밝은항에 서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바위 해안을 향해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는 어린 소녀 하나가 두 발을 모래사장에 단단히 딛고 서서 주먹을 허공에 흔들고 있었다.

“우와, 봐라. 아름이 또 화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사내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름이라고?” 한 아이가 비웃으며 외쳤다. “어둠 속에 있으면 훨씬 예쁘겠네!”

소녀는 분노에 몸을 떨며 서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무릎의 상처가 드러날 만큼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햇볕에 거의 금발처럼 탈색된 곧은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에는 번개 같은 눈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입술만은 틀림없었다.

“너… 네가 아름이야?” 시커는 그것이 질문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 소녀가 쏘아붙였다. “눈탱이 맞고 싶어?” 한동안 그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의 주먹이 천천히 풀렸다. 이내 얼굴에 깨달음이 번져 갔다. “시커? 바보야! 못 알아봤잖아!” 그녀는 활짝 웃었다. 그러자 한순간에 투박하고 수수한 어린 소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천사로 변해 버렸다.

“빨리 와!” 그녀는 이미 해안을 따라 달려가며 뒤돌아 외쳤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정말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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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ip Back

9월 8, 2026 by K. Blackthorn

시커는 무심코 아름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제야 떠올랐다. 아름은 밝은항에 있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가 불확실 마을을 떠났을 때처럼.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하려 했던 걸까? 그는 불확실 마을을 떠나고 싶었다. 어쩌면 크리스천처럼 순례자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좁은 문 너머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하늘 도성까지는. 그곳에 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쁄라 정도라면 몰라도. 하지만 그곳조차 너무나 멀었다.

어쩌면 그는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크리스천의 여정은 정말 이야기일 뿐이었을까? 장소들은 분명 존재했다. 절망의 수렁, 바알세불의 성, 좁은 문, 해석자의 집의 폐허. 하지만 전도자도 없었고, 선의도 없었으며, 해석자도 없었다. 십자가도 없었다.

처음 길을 떠났을 때 그는 혼자 걸어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름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크리스천은 크리스티아나 없이 걸었을지 모르지만, 크리스티아나에게는 그녀를 인도한 위대한 마음이 있었다. 마태와 사무엘과 요셉과 야고보도 있었다. 자비도 있었고, 뵈베도, 마르다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아름이 있었다. 손가락의 반지가 그 증거였다. 아름은 왕께서 자신을 위해 그 반지를 맡겨 두셨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해석자에게 받은 반지를 끼고 있었다. 정말 그녀를 위한 반지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빼앗은 것일까? 그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 꼭 맞았고, 자신의 반지도 자신의 손가락에 꼭 맞았다.

그는 아름의 재잘거림이 그리웠다. 심심하다고 투덜대는 모습도. 심지어 불평하는 것까지도. 새들도 조용했다. 마치 그들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것처럼.

집을 지으라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그는 약속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어디에 지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순례자가 집을 짓는 것이 맞는 일일까? 가이오는 집이 있었다. 므나손도 그랬다. 왕자께서도 집을 지으셨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크리스티아나와 아이들도 여러 해 동안 머물렀다. 아마도… 허락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아름을 위해. 그리고 언젠가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짓는 것이었다.

등 뒤에는 파멸의 도시가 남아 있었다. 크리스천이 그곳을 떠난 지 삼백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하늘에서 불은 내리지 않았다. 심판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아폴루온의 동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다. 저곳은 아니다.

어리석음 마을은 절대로 아니었다. 육신의 지혜도 아니었다. 아름과 자신이 원한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그는 전날 밤 잠을 잤던 움푹 팬 곳에 멈춰 섰다. 아름은 그를 위해 샌드위치를 싸 주었다. 쪽지도 함께였다.

‘내 시커를 위한 샌드위치. 사랑해요. — 아름.’

그는 그대로 누워 잠들고 싶었다. 꿈속으로 가서 아름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일렀다. 아직 해는 머리 위에 있었고, 그는 벌써 별장까지 오는 길의 절반을 걸어왔다. 오늘 밤에는 꼭 아름을 느림보라고 놀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름이 절망의 수렁에 빠졌던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 왜 그때 웃었던 걸까? 그녀의 상처받은 눈빛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얼마 뒤 그는 올리브나무에 지팡이를 기대어 세웠다. 참새 한 마리가 지저귀었다.

“그대가 사랑하는 이는 어디로 갔는가?”

마치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녀의 눈이 다시 환하게 빛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그녀의 발에 천 번이라도 입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알세불의 성을 둘러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어쩌면 그 안에 답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

아름 없이는 가지 않겠다.

그때는 나중에 가자고 말했지만, 그 나중이 아름 없이 돌아오는 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좁은 문의 여름 응접실에서 잠시 쉬었다. 아름이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정말… 당신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사람이야, 아름.

물병은 비어 있었다.

그녀 말이 맞았다.

누군가 이곳에 다녀간 것이다.

그 순간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구원의 언덕에서 내려다보았던 계곡 위의 마을. 시냇물이 가까이 흐르고 있었고, 폭포와 계단식 여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바로 그곳이다.

집은 거기에 짓는 것이다.

그리고 준비가 되면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날 수 있다.

난관의 언덕을 향하여.

별장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산들이 이미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공동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기다리지 않았다. 곧장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아름과 꿈에서 만나기 위해.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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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ht-Harbor

9월 7, 2026 by K. Blackthorn

마을에 들어서자 아름은 시커의 손을 조용히 놓고 그의 앞에 섰다. “시커.”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어둠의 땅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모두 잊어버려요. 선원들, 술집, 창녀촌… 여긴 밝은항이에요.”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덧붙였다. “여기서는 제 손을 잡으면 안 돼요. 그리고…” 그녀가 얼른 말을 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키스도 안 돼요.”

“여긴 모두가 서로를 아는 마을이에요. 소문도 정말 빨리 퍼지고요. 우린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벌써 다들 이야기하고 있을 거예요. 난 당신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시커. 그냥… 여긴 원래 그래요.”

시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은 바닷가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파도가 모래사장을 부드럽게 적셨고, 짙은 소금 냄새가 공기 가득 배어 있었다. 해안을 따라 늘어선 등불들이 바다를 은은하게 비추며, 어둠 속에서 작은 고깃배들이 물결에 흔들리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집들은 모두 아담했다. 세로로 세운 널빤지로 벽을 만들고 나무 너와지붕을 얹은 집들이었다. 집마다 작은 마당이 있었고, 어떤 곳에는 채소밭이, 어떤 곳에는 빨랫줄이, 또 어떤 곳에는 장대를 세워 그물들을 널어 두었다. 허리 높이쯤 되는 하얗게 회칠한 돌담이 집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름은 집 두 채 사이의 골목으로 몸을 돌려 들어갔고, 시커도 손짓으로 따라오게 했다. 검은색으로 칠한 쇠문 앞에 이르자 그녀는 그의 손을 놓았다.

그녀는 편안해 보였지만, 어딘가 긴장한 기색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가 제가 태어난 집이에요, 시커.” 그녀가 문을 밀자 쇠문이 조용히 열렸다.

시커는 몸을 조금 숙여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은 아늑하면서도 제법 넓었다. 집은 낮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있었고, 미닫이문이 달린 툇마루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정성껏 지은 집이었지만 아름다움보다는 살아가기 위해 지은 집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옆에는 작은 별채가 하나 있었고, 마당 건너편에는 창고와 변소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시커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대문도, 건물도, 모든 것이 아름의 키에 꼭 맞게 지어진 것 같았다.

마당 한쪽에는 정성껏 가꾼 채소밭이 있었고, 그 둘레를 수십 그루의 과일나무가 둘러싸고 있었다. 가지마다 주황빛 열매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과육이 두툼하고 표면은 매끈했다. 시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열매였다.

거룩이 집 밖으로 나와 시커의 손을 힘 있게 잡았다. “드디어 왔군.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었어.”

그때 아주 작은 체구의 여인이 문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보다도 머리 하나는 작아 보였다. 하지만 시커는 평생 이렇게 강인해 보이는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마르고 단단한 몸, 힘겨운 삶을 견뎌 온 흔적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짧고 곱슬곱슬했고, 눈빛은 너무도 매서워 시커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녀는 시커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왜 왔는지 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난 절대로 내 딸을 너와 결혼시키지 않을 거야. 내 아름을 빼앗아 갈 순 없어.”

“나가!” 그녀가 소리쳤다.

“엄마!” 아름과 거룩이 동시에 외쳤다.

거룩은 시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용히 손님채 쪽으로 이끌었다. 아름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손님채는 무척 작았다. 팔을 벌리면 양쪽 벽에 거의 닿을 것만 같았다. 좁은 침대 하나 외에는 아무런 가구도 없었다. 거룩은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담요와 베개를 들고 돌아왔다. “아버지는 고기 잡으러 나가셨어. 오늘 밤은 거의 들어오지 않으실 거야. 푹 쉬어, 시커. 내일 아침에 보자.”

시커는 어둠 속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잠이 들었다.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시커는 이마에 닿는 입맞춤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름이 몸을 굽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장난기로 반짝였다. “엄마가 아침을 차려 주셨어요.” 그녀가 말하더니 킥킥 웃었다. “우리 둘 다요.”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 “엄마한테 꼭 엄마라고 불러야 해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속삭였다.

아름은 그를 안채로 데려갔다. 아궁이에는 작은 불이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미 가운데 놓인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시커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얼굴은 어젯밤보다 조금은 누그러져 있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상은 세 사람 몫으로 차려져 있었다. 아름의 자리, 어머니의 자리, 그리고 시커의 자리. 식탁 한가운데에는 짙은 갈색 껍질을 두른 작은 빵들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갓 구운 생선이 담긴 접시가 있었다. 껍질은 아직도 지글거렸고, 눈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시커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어부의 딸과 사랑에 빠지면서도, 아침부터 생선을 먹게 될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름에게 몸을 기울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시… 배낭에 커피는 아직 남아 있어?” 그러고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는… 별로 배가 안 고픈데요.”

“어머.” 아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럼 증명해 봐요.” 그녀는 가장 큰 생선을 골라 시커의 접시에 올려놓더니, 그의 포크를 집어 손에 쥐여 주었다.

아름도, 어머니도 모두 시커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선도 그런 것 같았다. 그는 포크로 살을 조금 떼어 냈다.

“껍질은 먹지 말아요, 바보…” 아름은 어머니를 힐끗 보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름은 접시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생선을 가운데로 갈라 껍질을 벗겨 냈다. 그리고 흰 살을 포크로 떠서 자기 포크로 시커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아름!” 어머니가 날카롭게 말했다.

“엄마!” 아름도 번개 같은 눈빛으로 받아쳤다.

“맛있네요.” 시커가 최대한 그럴듯하게 말했다.

아름의 어머니는 피식 웃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아름도 시커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름은 다시 접시를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가시는 되도록 드시지 마세요.”

시커는 아름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식사를 이렇게 맛있게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한입 먹을 때마다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침 생선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지막 한입까지 다 먹은 시커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름이 그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그리고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엄마, 잘 먹었습니다.

“엄마, 잘 먹었습니다.” 시커가 조용히 말했다.

“나가!” 아름의 어머니가 소리쳤다.

아름은 웃음을 참지 못해 거의 사레가 들릴 뻔했다. 웃느라 눈물까지 흘렀다.

“아빠가 당신을 위해 특별한 걸 준비하셨어요.” 그녀가 겨우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분명 마음에 들 거예요.”

***

시커와 아름은 거룩과 함께 해변을 따라 난 길을 걸었다. 바다는 눈 닿는 곳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아침 햇살이 물결 위에서 반짝였다. 머리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길게 울었다.

아름은 시커의 손을 잡으려다 문득 멈추었다. 거룩이 두 사람 사이를 걸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무 예고도 없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한 손으로는 시커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아름의 손을 잡더니 두 사람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아 주었다. “왕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을 반대편의 작은 집에 이르자 아름이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온유! 나야, 아름!”

젊은 여인이 문을 열었다. 누가 봐도 아름의 언니였다. 아름보다 조금 나이가 들어 보였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시커.” 그녀가 따뜻하게 말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거룩 오빠에게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목소리는 조용하고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수줍음이 묻어났다.

도대체 거룩은 자기 이야기를 언제 그렇게 많이 했다는 걸까? 만나고 나서 열 마디도 채 하지 않았는데.

방은 아담했다. 어린 여자아이가 바닥에 앉아 장난감을 늘어놓고 놀고 있었다. 벽에는 책장이 가득 놓여 있었고, 책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온유는 한쪽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고, 자신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아름은 시커 곁에 바싹 붙어앉아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 남편이에요. 배움.” 온유가 소개했다. 그의 인상은 무척 강렬했다. 밝은 눈과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시커는 아름의 귀에 손을 가리고 속삭였다. “당신, 형부가 이렇게 잘생긴 줄은 한 번도 말 안 했잖아.”

아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배려 언니 남편을 보면 깜짝 놀랄걸요. 당신도 분발해야겠네요.”

온유는 시커에게 아름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순례자가 되었는지 물었다. 그들은 불확실 마을 이야기와 음악을 사랑하게 된 이야기, 공부하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러다 온유는 그의 책에 대해 물었다.

배움은 시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시커는 행상인에게서 너무 갖고 싶었지만 살 돈이 없어 포기했던 책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배움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걸어갔다.

그는 은색 글씨가 새겨진 검은 가죽 장정의 책 한 권을 꺼내 시커의 손에 올려놓았다.

에바의 속량.

시커는 책을 펼치는 순간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온유도. 배움도. 심지어 아름까지도.

거대한 붉은 용이 에바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

“또 돌아왔군, 에바드네 부인.” 용이 쉿쉿거리며 말했다. “작가가 이야기를 몇 번을 다시 시작하든, 넌 절대로 이길 수 없어.”

용은 비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페레그린 경.” 그 칭호는 그의 입에서 썩은 냄새처럼 흘러나왔다. “그는 언제나 죽는다, 부인. 너도 알잖아.”

에바는 믿음의 방패를 들어 몸을 숨겼다. 간신히 제때였다. 그 순간 두려움의 군주 바알세불이 불길을 가로질러 태연히 걸어 나와 그녀의 곁에 섰다.

“배신자!” 용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

아름이 그의 팔을 흔들었다. “시커!”

그가 눈을 깜빡였다. “응?”

배움이 다시 말했다. “가져가세요. 제 선물입니다.”

“고맙습니다.” 시커와 아름이 동시에 말했다.

시커는 바닥으로 내려앉아 장난감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어린 여자아이는 방긋 웃으며 인형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나도 이런 딸을 하나 갖고 싶다.” 그가 말했다.

아름도 그의 곁에 앉아 아이를 무릎에 올리고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우리도 가질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약속해요.”

아름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커의 손을 잡았다. “아빠를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면 안 돼요. 당신, 약속 지켜야 하잖아요.” 그리고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한테 한 약속.”

***

아름의 아버지는 두 사람이 돌아왔을 때 이미 일어나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오랜 세월 바람과 비를 맞아 거칠게 변해 있었다. 그는 우물 뚜껑을 치워 두고 긴 밧줄로 무언가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아빠가 어젯밤에 문어를 잡으셨어요.” 아름이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말했다. “아주 특별한 음식이에요.”

아름의 아버지는 문어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문어는 그녀의 손안에서 꿈틀거렸고, 아름은 기쁨에 작은 비명을 질렀다. 시커의 눈은 커졌다.

아름의 아버지가 손을 내밀었다. 시커는 그렇게 힘세고 거친 손을 난생처음 잡아 보았다.

“시커.” 그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나랑 한잔하자. 이야기 좀 하자꾸나.”

아름의 아버지는 그를 집 안으로 데려가 나무 마루에 앉더니 시커에게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벽 한쪽에는 이불과 베개가 가지런히 개켜 쌓여 있었다.

아름은 작은 상 하나를 들고 와 시커와 아버지 사이에 내려놓고는 아버지 곁에 앉았다. 이어 어머니가 포크 몇 개와 문어가 담긴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그것들을 상 위에 올려놓고 남편의 다른 쪽에 자리를 잡았다.

익히지도 않았다. 접시 위의 문어 다리들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시커는 목이 바짝 말랐다. 그는 아름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장난기가 전혀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먹거나… 그녀를 잃거나.

아름의 아버지는 뒤에서 병 하나와 잔 두 개를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병마개를 뽑은 뒤 병을 시커에게 건네고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아름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커는 그녀의 아버지 잔에 술을 따르고 자기 잔에도 따르려 했다. 그러자 아름은 고개를 저으며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안 돼요.

하지만 아름의 아버지는 병을 가져가 직접 시커의 잔을 채웠다.

아름의 아버지는 투명한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시커도 그대로 따라 마셨다. 목이 타들어 갈 듯 뜨거웠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아름의 아버지는 포크로 문어 다리 하나를 찍어 한입 베어 물고 천천히 씹었다. 아름과 어머니도 각자 포크를 들어 먹기 시작했다.

아름은 정말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나쁠 리는 없겠지. 시커는 포크를 들어 조심스럽게 한 조각을 집어 씹지도 않고 삼켰다. 문어가 목구멍 뒤에 달라붙었다. 거의 헛구역질이 나올 뻔했다. 아름이 조용히 킥 웃었다.

아름의 아버지는 다시 그의 잔을 채워 주고 병을 건네주었다. 시커가 이번에는 답례로 아버지 잔을 채우려는 순간, 어머니가 잔을 홱 빼앗아 갔다.

“안 돼.”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커는 문어를 한 점 더 집어 이번에는 천천히 씹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질겼다. 그는 술로 그것을 넘겼다.

아름의 아버지는 다시 세 번째 잔을 따르기 시작했다.

“아빠!” 아름이 눈을 번쩍이며 날카롭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듣지 않은 척 술을 끝까지 따랐다.

시커는 그것마저 단숨에 들이켰다. 아름의 아버지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넌 아름을 사랑하는구나.”

질문이 아니었다.

갑자기 아름의 어머니가 외쳤다.

“난 절대로 아름을 저 아이와 결혼시키지 않을 거예요!”

아름의 아버지는 차분히 아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아름은 상 반대편으로 돌아와 시커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전 아름을 사랑합니다. 앞으로도 언제나 사랑할 겁니다.” 말이 놀랄 만큼 쉽게 흘러나왔다. 술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도요.”

아름의 눈이 불타올랐다. 태양보다도 밝게 방 안을 환히 비추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눈빛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아버지는 다시 한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은 여기 남는다.” 그가 말했다. “넌 혼자 돌아가거라.”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손짓했다. “아름이 살 집을 짓고… 그녀를 책임질 수 있게 되면… 다시 오너라. 내 허락을 주마.”

아름은 그의 손을 힘껏 쥐었다. 그러고는 아직도 꿈틀거리는 문어 한 점을 포크로 찍어 그의 입속에 쏙 밀어 넣었다.

***

시커는 등을 꼭 끌어안고 잠든 아름의 온기에 눈을 떴다.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아름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길고 오래 이어진 키스였다. 두 사람은 숨이 찰 때까지 서로를 놓지 않았다.

“오늘은 떠나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당신과 함께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우린 허락을 받았잖아.” 시커가 말했다. “그것만 있으면 돼. 이제 시간문제야.”

아름은 몸을 일으켜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 허락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허락은 아니에요, 시커.”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아빠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거라는 걸 아세요. 그리고…” 그녀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 “당신이… 나를 데리러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하세요.”

“하지만 아버님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시잖아.”

“당신에게 줄 게 있어.” 시커가 배낭을 뒤적이며 말했다. 그러다 작게 웃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가에서 몇 구절을 베껴 적은 거야.”

남쪽에서 올라오는 이가 누구인가?
달처럼 아름답고,
해처럼 찬란한 이여.
나와 함께 가자,
내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순결한 이여.
겨울은 지나갔고,
봄이 찾아왔으며,
노래할 계절이 왔다.
일어나라,
나의 아름이여.
사과로 나를 먹여 다오.
나는 사랑으로 병들었노라!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지만…
너처럼 아름다운 이는 없다.

아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정말… 아름다워요.” 그녀가 말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공기에는 말보다 더 무거운 그리움이 가득 차 있었다.

“아름.” 시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아픔을 견딜 수가 없어. 당신이 너무 보고 싶을 거야.”

“며칠처럼만 느껴질 거예요, 자기.”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게다가… 난 매일 밤 당신 꿈에 찾아갈 거예요. 약속해요.”

“가기 전에…”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에게 줄 게 하나 있어요.”

그녀는 손을 들어 반지를 살짝 돌렸다. 햇빛이 일곱 개의 눈부신 다이아몬드 위로 폭포처럼 쏟아졌다. “난 이 반지를, 내가 당신의 사람이라는 약속으로 끼고 있어요. 절대 의심하지 말아요.”

그녀는 드레스 목선을 따라 손을 넣어 가느다란 은목걸이를 꺼냈다. 그 끝에는 황금 반지 하나가 달려 있었다. 그녀는 등을 돌려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목걸이 좀 풀어 주세요, 시커.”

목걸이를 푼 뒤 그녀는 반지를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오닉스가 박혀 있었고, 양옆에는 나무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왕의 사자 비밀이 제게 이 반지를 간직하라고 했어요. 함께 하늘 도성까지 걸어갈 사람을 만날 때까지요. 그 사람의 것이니까요.”

그녀는 다시 반지를 집어 시커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놀랍도록 꼭 맞았다. “이건…” 그녀가 경이로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거예요.”

“이 반지를 거룩한 약속으로 간직해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나에게만 하는 약속이 아니라… 왕께 드리는 약속으로요.”

그리고 그녀는 눈에 번개를 번뜩이며, 햇살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억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내 사람이에요. 영원히… 나만의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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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ey – Part II

9월 3, 2026 by K. Blackthorn

시커는 아름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녀는 이미 불을 다시 피워 놓았고, 작은 냄비에서는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그녀는 뜨거운 물을 그의 양철 컵에 따라 주고는 냄비를 뒤집어 근처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잠꾸러기.”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깎아 만든 나뭇가지로 음료를 저은 뒤 컵을 그에게 건넸다. 통역자의 집에서 커피는 또 어디서 구한 걸까? 대체 그 배낭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거지? 시커는 한 모금 마시고는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내 컵이랑 내 칼까지.” 그는 짐짓 못마땅한 척 말했다. “내 배낭에서 또 뭘 꺼낸 거야?”

아름은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천만에요, 시커.”

“묻기 전에…” 그녀는 가볍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여기 당신 감미료예요.”

그는 나뭇잎 사이로 비친 아침 햇살이 이슬을 말려 놓은 풀밭을 찾아가 앉았다. 아름은 작은 빵 한 덩이를 내밀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배 안 고파.”

새들이 나뭇가지에서 노래했고, 다람쥐 한 마리가 다른 다람쥐를 쫓아 가까운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어제는 왜 그렇게 시간에 쫓겼던 걸까? 오늘 하루만 아름과 함께 걸으면 어둠의 땅에 도착할 텐데. 그때 문득 파멸의 도시가 떠올랐다. 이제는 말해야 했다. 왜 그는 좋은 순간마다 망쳐야만 하는 걸까? 매번.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아름, 이리 와.” 그는 자기 옆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며 그녀를 불렀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다리를 들어 올려 장화를 벗기고 양말을 벗겨 냈다. “할 말이 있어.”

배낭에서 붕대를 꺼내자 아름이 물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입 맞춰 주면 나을까요?”

그는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뒤꿈치와 발가락 두 곳에 붕대를 감아 주었다. “냄새나는 발에는 입 안 맞출 거야!”

아름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말없이 다른 발을 내밀었다.

“아름, 난 당신을 속이려던 게 아니야. 미안해.” 그가 말했다. “그냥… 언제 말해야 할지 끝내 찾지 못했어.” 다른 발에는 물집이 하나뿐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걸을 때 발을 쿵쿵 구르지 마, 우리 아기.” 그것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붕대를 다 감고 장화도 다시 신겨 준 뒤, 아름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두 손을 자기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래서요?”

쉽게 말할 방법은 없었다. 그냥 말해야 했다. “우리 엄마는 아빠를 떠났어. 그래서 내가 혼자 불확실 마을에 있었던 거야.”

“왜요?” 그녀가 거의 속삭이듯 물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안에는 저주가 있어. 거인 진노가 우리 아버지를, 그 아버지를, 또 그 이전 사람들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따라다녔어.” 그녀의 눈에는 오직 다정함만이 담겨 있었다.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망가뜨려. 늘 그랬어.”

“당신은 당신 아버지가 아니에요.” 그녀의 눈에 번개가 번뜩였다. “그리고 난 당신 어머니가 아니에요.”

그녀는 두 팔로 그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

파멸의 도시로 가는 길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밟아 온 큰길이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언덕을 하나 넘자 도시의 성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름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의 다 왔네요.”

시커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거리도 잘 못 재는군.” 그러다 그녀의 상처받은 눈빛이 떠올라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래도 아직 한참 걸어야 해, 우리 애기.”

“시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아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당신 동생 이야기나 해 주세요.”

“생각 깊은 이 말이야?” 시커가 웃었다. “가끔은 생각 없는 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야 했나 싶다니까. 그래도 좋은 녀석이야.”

“이야기가 별로 없네요.”

“나보다 한참 어렸거든. 부모님이 날 불확실 마을에 두고 떠났을 때가, 그 애가 겨우 재미있어질 나이였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래도 그때 한 번은…” 시커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뭔데요?”

“아니.”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도시에 가까워지자 시커가 말했다. “이름하고는 전혀 다르죠?” 회반죽은 새로 바른 듯 깨끗했고, 성벽도 말끔했다. 어쩌면 최근에 다시 칠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성문을 지나자 목조 골조로 지은 삼사 층짜리 집들이 줄지어 그들을 맞이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삐 오가고 있었고, 도시 전체에는 낮은 이야기 소리가 잔잔히 퍼져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거대한 구리상이 우뚝 서 있었다. 사자의 머리, 곰의 손과 발, 온몸을 덮은 물고기 비늘. 등에 돋친 용의 날개는 거만하게 펼쳐져 광장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징그러워요.” 아름이 말했다.

“아폴루온.” 시커가 비문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백 년이나 지났는데도 아무도 이걸 치울 생각을 안 했네.”

시커는 배낭에서 작은 검은 수첩을 꺼냈다. “흠…”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디 보자.”

아름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가요. 여기 너무 으스스해요.”

아름이 그를 광장 밖으로 끌고 가는 동안에도 시커는 계속 수첩을 넘겼다. “여기다.” 마침내 그가 한 골목을 내려다보고 다시 다른 골목을 살폈다. “집은 다리 건너편에 있을 거야.”

그는 아름의 손을 잡고 골목 하나를 지나고 또 하나를 지나 마침내 강가에 이르렀다. 우아한 목조 다리가 강 위를 둥글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강물을 가리켰다. “역시 맞았네. 이 강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아래에서는 물살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며 진흙을 휘저었고, 썩은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혼란의 강.” 그가 말했다. 강물이 자신을 비웃으며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절망의 수렁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다리는 하나도 없어.” 그러더니 덧붙였다. “아, 여기랑… 우둔 마을은 빼고. 거긴 다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하나 더 있어요.” 아름이 말했다. “어둠의 땅으로 가는 길에도요. 거기서는 항구로 흘러들어가요.”

강 건너편에 이르자 시커는 길을 물었다. 그리고 골목 하나를 지나 또 다른 골목을 돌아 마침내 다른 거리로 나왔다.

“정말 길을 아는 거 맞아요?” 아름이 물었다.

시커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글쎄?”

마침내 두 사람은 작은 집 앞에 섰다.

“애기, 당신이 노크해.”

***

생각 깊은 이가 문을 열고 잠시 아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시선이 시커에게 옮겨갔다. “시커?” 그는 집 안을 향해 돌아서며 소리쳤다. “엄마! 시커 왔어! 그것도…”

아름의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그녀는 시커에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당신 동생이 이렇게 귀여운 줄은 몰랐네요.”

“흥.” 시커가 코웃음을 쳤다.

시커의 어머니는 그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이내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엄마.” 시커가 말했다. “여기는 아름이에요. 제…”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결혼할 사람이에요.” 그는 아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우리 엄마예요. 그리고 저 말 안 듣는 동생, 생각 깊은 이.”

“아름.” 시커의 어머니가 그녀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았다. “어서 들어오렴. 앉아. 물이라도 한 잔 줄까?”

“배고프니?” 그녀가 물었다. “아직 저녁때는 아니지만, 배고프면 금방 뭐라도 만들어 줄 수 있어.”

“괜찮아요, 엄마.” 시커가 말했다. 아름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머물 수는 없어요. 해 지기 전에 어둠의 땅까지 가려고 하거든요.”

“어둠의 땅?” 시커의 어머니가 되물었다. “거긴 위험한 곳이야. 아름은 어둠의 땅 사람이니?”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시커를 바라보았다.

아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시커는 자신이 어떻게 불확실 마을을 떠났는지 이야기했다. 물론 절망의 수렁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빼놓았다. 그는 동행인과 오두막, 그리고 밀밭에서 아름을 처음 만난 일을 들려주었다. 아름도 중간중간 끼어들어 이야기를 이어 갔다. 물론 크리스마스에 나누었던 키스는 빼고.

시커의 어머니는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가 웃어 주길 바랐다. 아름를 안아 주기라도 하길 바랐다. 뭐라도.

시커의 어머니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생각 깊은 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커, 보여 줄 게 있어.”

시커는 자리에서 일어나 생각 깊은 이를 따라 방 한쪽으로 갔다. 등 뒤에서 아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시커의 아버지를 떠나셨어요?”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는군.

“이것 좀 봐.” 생각 깊은 이가 웃으며 종이 뭉치를 들어 보였다.

방 반대편에서 아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해가 안 돼요. 그냥… 같이 즐겁게 지내면 안 되는 건가요?”

생각 깊은 이가 그린 것은 젊은 여자들의 그림이었다. 모두 옷은 입고 있었지만 몸매는 지나치게 굴곡져 있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머리가 없었다. 시커는 피식 웃었다. “재능은 있네.”

“아니요.” 아름이 단호하게 말했다. “전 용서는 정말 그렇게 단순한 거라고 믿어요.”

“엄마가 이걸 보면 날 죽일 거야.” 생각 깊은 이가 말했다. “형이 좀 맡아 줄래? 잠깐만.”

시커는 그림들을 조심스럽게 접어 배낭에 넣었다. 바로 그때 이번에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거인 진노에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어 보고, 나만큼 눈물을 흘려 본 다음에야 나를 판단해도 늦지 않아!”

생각 깊은 이는 시커를 바라보았다. “형… 그냥 그 여자 잊어버리는 게 어때?”

“내 아들이 널 힘들게 할 거야.” 시커의 어머니가 말했다. “아름, 널 아껴서 하는 말이야.”

“전 어머님이 아니에요!”

생각 깊은 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아름은… 좀 기가 센 것 같긴 해.”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지나치게 컸다.

***

아름은 뒷골목을 걸어가는 내내 충격을 받은 듯 말이 없었다. 시커는 계속 여행을 이어 가자고 여러 번 설득했지만, 그녀는 끝내 그의 아버지를 꼭 만나겠다고 고집했다. 정말 고집이 셌다.

조금 더 머물렀다. 분위기도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떠날 때는 아름과 시커의 어머니가 서로를 안아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시커는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어머님은 절 싫어하셨어요.”

“아니야, 아름. 엄마는 원래 그런 분이야. 시간을 드리면 돼. 나처럼 당신을 사랑하게 되실 거야.”

“그리고 전 기 센 사람도 아니에요!” 그녀의 눈에 번개가 번뜩였다.

“난 그런 말 안 했잖아.”

“그래도 아니라는 말도 안 했잖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아름…” 시커가 말했다. “조금… 아주 조금은 기가 셌어요.”

“엄마 말로는 아빠가 여기 사신대.” 시커가 문 앞으로 다가가 노크했다. “이번에는 얌전히 있어.”

시커의 아버지가 문을 열었다. “오, 시커!” 그는 활짝 웃으며 시커를 끌어안았다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누구지?”

“전 아름이에요.”

“정말 딱 맞는 이름이구나!” 시커의 아버지가 말했다.

아름은 웃음을 터뜨렸다. “시커도 저한테 똑같이 말했어요!”

“그럴 만도 하지.” 시커의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들은 보는 눈이 좋거든!”

집은 아주 작았다. 방 하나가 전부인 것 같았다. 시커의 아버지는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 위를 대충 치우더니 둘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이야기해 보렴.”

시커는 불확실 마을을 떠난 일부터 아름을 만난 일, 그리고 청혼한 순간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커의 아버지는 아름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널 딸이라고 불러도 되겠니? 아직은 너무 이른가?”

아름이 미소 지었다. “네. 그렇게 불러 주시면 정말 좋겠어요.”

“엄마는 만나고 왔니?” 시커의 아버지가 물었다. “설마 절망의 수렁 이야기는 하지 않았겠지? 엄마 성격 알잖니.”

“아니요.” 시커가 말했다. “수렁 이야기는 안 했어요. 엄마는 만나고 왔지만요.”

“왜 이렇게 사세요?” 아름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더 나은 삶을 원하지 않으세요?”

“시커 엄마가 날 떠날 때,” 그가 말했다. “모든 걸 가져갔어.” 그는 시커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지.”

“시커 어머님도 작은 집에 사시고, 아버님도 작은 집에 사시잖아요.” 아름이 말했다. “다시 함께 사시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텐데요.”

“나도 그러려고 애쓰고 있어.” 그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전 어머님께도 말씀드렸어요. 용서는 어렵지 않다고요. 같이 식사하시고, 서로 웃어 주세요. 지난 일은 잊으시고요.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노력하시면 되잖아요.”

시커의 아버지 목에 핏줄이 불거졌다. “잘 들어. 난 죽도록 일하고 있어. 있는 힘을 다해서 애쓰고 있다고. 그런데 아무도, 아무도 나한테는 관심이 없어. 아무도.”

아름은 움찔하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입을 열려 했지만, 시커가 그녀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아름.”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커의 아버지 얼굴에서 붉은 기운이 서서히 가셨다. 아름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버지, 오늘 뵈어서 정말 좋았어요.” 시커가 말했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시커의 아버지는 아름을 다시 한번 꼭 안아 주었다. “몸조심하렴, 아름. 내 딸. 꼭 다시 보러 와.”

“그럴게요.” 아름이 조용히 대답했다.

***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골목을 지나고, 거리를 지나고, 흉측한 아폴루온의 동상을 지나 마침내 성문을 빠져나왔다. 길은 파멸의 도시 외곽을 따라 굽이쳤다. 혼란의 강 위에 놓인 돌다리를 건넌 뒤에야 아름이 입을 열었다.

“당신 아버지가 대머리인 줄은 한 번도 말 안 했잖아요.”

“뭐?”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 그게 아름이 얻은 결론이란 말인가?

“난 당신은 대머리 안 됐으면 좋겠어요. 다른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난 대머리 안 돼, 아름.” 시커가 말했다. “난 외할아버지를 꼭 닮았거든. 외할아버지는 대머리가 아니셨어.”

“그건 모르는 일이죠.” 그녀가 훌쩍였다. “당신 어머니는 절 싫어하시고… 당신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하셨어요.”

“원래 안 그러셔.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그러니까 엄마가 떠난 거잖아.”

“당신은 그러잖아요. 당신은 항상 미안하다고 하잖아요.”

“응. 그러려고 노력하지.”

“그런데 만약…”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언젠가 그러지 않게 되면요?”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시커도 그녀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미워!”

시커는 눈물을 꾹 참았다. “그런 말은 너무 심해, 아름. 정말 아파. 너무 아프다고. 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시커.” 그녀가 말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그녀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시커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숫사슴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엄한 뿔이 머리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 사슴은 가만히 서서 아름을 바라보았다.

아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몸을 돌려 시커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래요. 난 정말 당신을 사랑해요, 시커.”

어쩌면… 정말 그만큼 단순한 일인지도 몰랐다.

***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시커와 아름은 어둠 속을 계속 걸었다. 큰곰자리는 말없이 그들 뒤를 따라 천천히 하늘을 돌고 있었다.

“야영할 필요 없어요, 시커. 거의 다 왔어요. 전 어둠의 땅을 아주 잘 알아요.”

“그 말은…” 시커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어둠의 땅이 항상… 어둡기만 한 건 아니라는 뜻이야?”

아름은 그의 손을 찰싹 때렸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저 멀리, 조용한 어촌 마을의 불빛들이 반짝이며 일렁이고 있었다.

“빨리 와요, 여보— 우리 집이에요!” 아름이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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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urney – Part I

9월 2, 2026 by K. Blackthorn

시커가 공동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아름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 짐도 모두 꾸려 놓았고, 의지가 약한 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모두가 그를 믿음에 굳센 이라고 불렀다.

“아름 양, 이 침낭을 가져가십시오.” 믿음에 굳센 이가 말했다. “이젠 제게 필요 없으니까요. 그리고 시커, 이건 동행인의 것입니다.” 그는 익숙한 침낭을 가리켰다. “저도 오늘 떠납니다. 제 차례는 끝났거든요.” 그의 얼굴에서 먹구름은 완전히 걷혀 있었고, 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시커는 그가 그렇게 활짝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집으로 돌아갑니다. 제 아내에게요!”

명랑 양이 분주하게 식당으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샌드위치를 찾는 시커!” 그녀가 경쾌하게 외치며 작은 리넨 꾸러미를 아름의 배낭 속에 쏙 넣어 주었다. 그러고는 아름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찾고 있던 게 무엇이든, 이제는 찾은 것 같네요.”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믿음에 굳센 이가 덧붙였다.

“그럼요! 자, 다들 앉아요. 빈속으로 길을 떠나는 건 좋지 않답니다.” 이번에는 명랑 양도 망설임 없이 함께 자리에 앉았다.

믿음에 굳센 이는 아침 식사를 허락하신 것과 명랑 양을 위해, 그리고 앞에 놓인 여정을 위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어 왕께서 시커와 아름의 여행을 축복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그러자 명랑 양도 조용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시커와 아름의 길을 지켜 주시고, 앞으로 살아갈 삶도 언제나 주님의 손으로 보호하여 주옵소서.”

식사를 마친 뒤, 믿음에 굳센 이는 좁은 길을 따라 북쪽으로 떠났고, 시커와 아름은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명랑 양은 해석자의 집 폐허 앞에 서서 오래도록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

그날은 더없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눈부셨으며, 느긋한 바람이 살며시 불어왔다. 구름은 갈 곳도 없는 듯 천천히 하늘을 흘러갔다. 아름은 시커의 곁을 걸으며, 의미 있는 이야기와 별것 아닌 이야기를 끝없이 이어 갔다.

두 사람이 좁은문에 이르자 아름이 여름 응접실을 가리켰다. “시커, 우리 잠깐 쉬었다 갈까요?” 그녀가 물었다.

응접실은 시커가 기억하는 그대로 먼지가 수북했다. “우물이 있어요.” 아름이 말했다. “근처에 두레박도 있을 거예요. 물 좀 길어다 주실래요?” 그녀는 빗자루를 찾아 쓸기 시작했다. 시커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마른 천으로 탁자를 닦고 있었다. 그녀는 천을 물에 적셔 물병을 깨끗이 닦은 뒤, 두레박으로 길어 온 물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어떻게 우물과 두레박이 있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아름은 시커보다도 좁은문을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해는 벌써 높이 떠오르고 있었고, 아직 갈 길은 멀었다.

“아름,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시커가 서성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청소만 했다. “쉰다고 하지 않았어요?”

“됐어요.”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안락의자를 가리키고 소파의 먼지를 툭툭 턴 뒤 자리에 앉았다. “생각을 좀 했어요…”

“우리가 걸어왔어야 하는 시간에 말이죠.”

아름이 눈살을 찌푸렸다. “쉬어야 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다음에 올 순례자들을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청소해야 하잖아요.”

“생각을 좀 했어요.” 그녀가 다시 말했다.

우리가 걸어왔어야 하는 시간에. 시커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가는 길에,” 아름이 말을 이었다. “당신 부모님도 찾아뵈어요.”

“안 돼요.” 시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왜 안 되는데요, 시커? 저는 꼭 두 분을 만나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 “아니… 결혼할 거예요. 그건 당신도 알잖아요.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축복해 주시지 않을 거예요.”

시커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길이 너무 돌아가요, 아름. 아주 먼 길이에요. 당신도 많이 피곤할 거예요.” 그녀는 전혀 납득하지 않는 눈치였다. “다음에요.” 그가 말했다. “약속할게요. 그때는 꼭 부모님을 만나게 해 드릴게요.”

고집스러운 표정이 아름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저를 데려가든지… 아니면 지금 당장 돌아가요.”

시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마침내 그가 말했다. “하지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아름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은 뒤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그의 불안한 마음을 눈치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야기해야 할 일이었다.

***

베엘세붑의 성 앞에 이르렀을 때, 황량하고 차가운 성채가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버려진 채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아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시커, 안에 들어가 봐요!”

“안 돼요.”

“삼백 년이나 비어 있었잖아요! 예전처럼 모험도 하고요.”

“안 됩니다.”

아름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예전의 당신은 재미있었는데.”

시커는 어이가 없었다. 정말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걸까? “아름, 애기.” 그가 차분히 말했다. “수렁을 밤에 건너고 싶어요?” 잠시 말을 멈춘 뒤 덧붙였다. “안 돼요. 이제 애처럼 굴지 말아요. 다음에요. 약속할게요.”

***

해는 어느새 하늘 한가운데를 지나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름은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 듯했다. 아니면 아직 화가 난 것일 수도 있었다. 시커는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피곤해요.” 아름이 투덜거렸다. “발도 아프고요.”

“그럴 만도 하죠, 아름.” 여행 중에 좁은문을 청소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배고파요.” 그녀가 발을 쿵쿵 굴렀다. “당신은 사람을 너무 부려먹어요.”

“이제 발이 더 아프겠네요, 우리 애기?” 시커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도 꽤 배가 고파요.” 그는 근처의 올리브나무를 가리켰다. “저기서 명랑 양이 뭘 싸 주셨는지 봅시다.”

아름은 올리브나무 그늘 아래 부드러운 풀밭에 앉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짙은 왕실 푸른빛을 띤 길고 가느다란 줄기, 은은한 보랏빛이 스며들고 황금빛 결이 흐르는 꽃잎. 세 장은 위를 향하고, 세 장은 아래로 우아하게 굽어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리넨 꾸러미를 꺼내 조심스럽게 풀었다.

안에는 샌드위치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이건 제 거.”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이건 우리 남편 거.” 이번에는 얼굴도 붉히지 않았다.

새들이 두 사람 주위를 노래했다. 꽃들은 바람에 흔들렸다. 그리고 아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시커는 그냥 이곳에 남고 싶었다. 풀밭에 누워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름은 부츠 한 짝을 벗고 양말도 벗어 내렸다. 뒤꿈치에는 물집 하나가 부풀어 있었고, 발가락에도 두 개가 더 잡혀 있었다. “제가 발이 아프다고 했잖아요.”

“우리 애기 많이 아팠겠네요.” 시커가 말했다. “이제 발을 쿵쿵 구르지는 말아요.”

***

해가 지평선 너머로 기울 무렵, 두 사람은 수렁에 도착했다. 시커는 눈앞의 광경에 놀랐다. 징검다리도 없었고, 동행인이 설명해 주었던 낡은 다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깊숙이 박아 넣은 말뚝들이 진창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고, 한때 모든 것을 삼켜 버리려 했던 수렁 위에는 튼튼한 다리가 놓여 있었다. 두꺼운 활엽수 판자는 놀라울 만큼 잘 보존되어 있었고, 견고한 목재 구조물이 수렁 전체를 가로질러 떠받치고 있었다. 양옆에는 낮은 난간도 설치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다리 위에 올라서자 아름은 시커의 팔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수렁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저기요.”

“저기 뭐가 있어요?”

“제가 빠졌던 곳이에요.” 그녀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시커는 다시 수렁의 진창이 몸의 온기를 빨아들이던 감각을 떠올렸다. 발버둥 치던 기억, 며칠이나 지난 것처럼 느껴졌던 시간, 그리고 결국 의식을 잃었던 순간까지. 동행인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수렁 가장자리였다. 풀도 보였고, 꽃도 보였다. 참새들 지저귀는 소리까지 아직 들리는 곳이었다.

시커는 웃고 말았다.

아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불꽃도 없었다. 번개도 없었다. 그저 깊고 조용한 슬픔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시커의 팔을 놓더니 등을 돌려 천천히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아름, 잠깐만요. 미안해요.” 시커가 급히 뒤따라갔다. “비웃으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냥… 제가 거의 죽을 뻔했던 걸 떠올리니까…” 그는 숨을 골랐다. “그래도 인정해야죠…”

아름이 돌아섰다. 눈물은 이미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저를 과소평가해요.” 그녀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강하고, 저는 약해요. 저는 아파요. 그런데 당신은… 아픈 것조차 저보다 더 잘하잖아요.”

“미안해요…” 시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전 당신이라면 제 마음을 이해해 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사랑한 거예요.” 아름이 말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줄 알았는데.”

시커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하자, 아름은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혼자 다리를 건너 걸어가 버렸다.

***

수렁 건너편 낮은 언덕 아래에는 작은 숲이 우거져 있었다. 아름은 이미 배낭을 내려놓고 침낭을 펼치고 있었다.

시커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무사히 수렁을 건넜다. 아까 웃어 버린 일은 후회스러웠다. 아름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왜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어려운 사람이었을까?

그는 자신의 침낭을 그녀의 침낭 가까이에 펼쳤다. 그녀를 지켜 줄 만큼은 가깝게, 하지만 그녀에게 공간을 줄 만큼은 떨어져서.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큰곰자리는 이미 하늘을 돌기 시작했고, 이 계절에는 사냥꾼자리를 보기엔 너무 늦었지만, 새벽 해 뜨기 직전이라면 어쩌면 잠깐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시커는 마른 나뭇가지를 몇 개 모아 먼저 지나간 여행자들이 남겨 둔 화덕 안에 가지런히 쌓았다. 배낭에서 동행인이 주었던 부싯돌과 부시를 꺼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불길이 따뜻하게 피어올랐다.

아름은 이미 침낭에 누워 쉬고 있었다. 시커도 그녀의 곁에 몸을 눕혔다. 그러자 아름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침낭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시커가 바라보고 있는 반대편으로 걸어가더니, 그의 침낭에 꼭 맞닿도록 자기 침낭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그의 몸에 온몸을 기대어 누웠다.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더니 깊고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우리 싸우지 말아요, 시커. 당신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아요. 미안해요. 저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그녀는 두 팔로 그를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시커. 정말… 정말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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