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 아침, 시커는 아름을 깨우지 않으려 조용히 옷을 입었다. 아름은 그가 사 온 소파는 단호히 거절하고 침실 바닥에 담요를 펼쳐 놓았다. 이제부터 두 사람이 잠을 잘 곳은 바로 여기였다.
“앞으로는 가구를 전부 같이 살 거야.” 아름이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시커는 그저 잠잘 곳이 하나 필요했을 뿐이었다. 바닥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아름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춘 뒤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왔다. 점심때가 되면 다시 돌아와 아름을 보고, 그다음 방앗간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방앗간에 도착한 시커는 신음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없는 동안 호밀과 보리, 밀을 가득 실은 수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자루 하나를 어깨에 둘러메고 곡물 창고까지 계단을 올라가 쿵 하고 내려놓은 뒤 다시 수레 쪽으로 향했다.
수레들을 훑어보니 적어도 수십 번은 오르내려야 할 것 같았다. 자루를 그대로 밖에 둘 수도 없었다. 여름 더위에 곡식이 상해 버릴 테니까. 죽도록 서두르면 정오쯤 끝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점심을 먹을 시간은 없었다. 이번에는 창고에 쌓인 밀가루 자루들을 다시 밖으로 나르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오후가 되면 마부들이 소를 끌고 돌아올 테고, 그때까지 밀가루를 모두 준비해 두어야 했다. 시커는 또다시 신음 소리와 함께 자루를 어깨에 둘러메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름.
그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제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분명 자신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울었겠는가?
그는 두 번째 자루를 첫 번째 자루 옆에 내려놓고 다시 하나를 가지러 갔다. 아쉬움이 마음을 갉아먹었다. 계곡이 내려다보이던 그 땅을 얼마나 갖고 싶어 했던가. 조금만 더 열심히 일했더라면. 그래도 마음은 쓰렸다. 아름이 새집을 보자마자 기뻐하며 자신을 꼭 끌어안고, 이 집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말해 줄 거라고 상상했었다.
그는 자루를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오갈 때마다 머릿속에서는 할 말이 맴돌았다. 이렇게 말할까… 아니, 저렇게 말하는 편이 낫겠지. 끝없이 되풀이하며 오갔다. 마침내 마지막 자루를 내려놓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물통을 들어 길게 들이켰다.
이제 남은 것은 밀가루뿐이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름에게.
***
아름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고는 담요 너머로 손을 뻗었다. 시커는 이미 떠난 뒤였다.
가슴 한구석이 조금 저릿했다. 지난밤 그의 실망한 얼굴이 대낮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벌써 그녀에게 싫증이 난 걸까? 떠나기 전에 살짝이라도 깨워 줄 수는 있었잖아.
그녀는 함께 덮고 잔 담요를 가지런히 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침대였다. 바닥에서 자는 건 상관없었지만 시커는 계속 불평했다. 그래서 그 소파를 산 거라고 했다. 아직도 그의 취향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물건이었다. 게다가 불편하기까지 했다.
거실 한쪽 벽에는 시커의 책들이 쌓여 있었다. 책장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식탁이었다.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식탁.
시커는 점심에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다.
마을이나 둘러보다가 그를 위해 맛있는 것이라도 사 오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
아름은 마을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눈길을 끈 것은 단정한 집들도, 잘 가꿔진 꽃밭도 아니었다.
고요함이었다.
웃음소리도 없었다.
사람들 목소리도 없었다. 밝은 항구 골목을 어슬렁거리던 들고양이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적막뿐이었다.
텅 비고, 가슴 저미도록 외로운 적막.
마을 한가운데 가까이 이르러서야 아름은 사람을 발견했다. 자기 또래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 둘이었다.
첫 번째 여자는 여우처럼 걸었다. 교활하고, 지나칠 만큼 자신만만했다. 아름이 좋아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긴 검은 웨이브 머리를 익숙한 몸짓으로 넘기며 몸을 살짝 흔들어 가까이 다가왔다.
“그 유명한 아름이 당신이구나.” 초록빛 눈동자가 그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르네.” 아름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두 번째 여자가 서둘러 다가왔다.
“매혹! 그러면 안 되잖아.”
그녀는 부드러운 얼굴에 온화한 푸른 눈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아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사촌 대신 사과드릴게요. 기쁨 마을에 온 걸 환영해요. 저는 안락이에요.”
“언니.”
매혹이 부드럽지만 끝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먼 사촌이야.”
안락이 굳어진 목소리로 받아쳤다.
“언니.”
매혹이 다시 강조하더니 거의 다정하게 속삭였다.
“입양됐지만.”
안락은 매혹을 노려본 뒤 아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와요.” 그녀가 따뜻하게 말했다. “마을을 구경시켜 드릴게요.”
–
아름은 보기 흉한 소파 위에 리넨 천을 펼치고 빵 한 덩이와 올리브, 치즈, 그리고 토마토 하나를 올려놓았다. 정말 식탁이 필요했다. 안락은 이미 어디서 살 수 있는지도 알려 주었다.
그녀는 기다렸다.
정오가 되었다.
그래도 시커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빵과 치즈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눈가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분명 약속했는데.
그녀는 바닥에 앉아 보기 흉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시커의 책더미 옆에 놓인 가방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빵을 조금 뜯어 천천히 씹으며 시선을 다시 그 가방으로 돌렸다.
***
시커는 방앗간을 나서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루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고 무겁게 흘렀고, 온몸은 쑤시고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름에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아름에게 줄 맛있는 것을 하나 사 갈까 잠시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단 1분도 아까웠다. 그저 빨리 그녀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아름!”
그가 문을 열며 불렀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름은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눈에서는 번개가 번쩍이고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시커의 가방이 뒤집혀 내용물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이게 뭐야?”
그녀가 그의 파이프를 치켜들며 따져 물었다.
시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언제 말해 줄 생각이었어?” 아름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몰아붙였다. “아니면 애초에 말할 생각도 없었던 거야?”
“그냥…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됐을 뿐이야, 아름. 삼 년은 너무 길잖아.”
아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목소리는 떨리며 낮아졌다. “그 여자도 네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됐어, 시커?”
그 여자?
아름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안락을 질투하는 건가?
“그런 거 아니야, 아름. 안락은… 그냥 여동생 같은 사람이야.”
“안락?” 아름이 비웃었다. “안락?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거짓말하지 마.” 그녀는 일부러 흉내 내듯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아름, 당신 얘기는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녀는 다시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눈에서는 여전히 번개가 번쩍였다. “바보는 네야? 아니면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는 거야?”
“차라리 밝은 항구를 떠나지 말걸 그랬어.”
그녀는 홱 돌아서더니 쿵쿵 발을 구르며 침실로 들어가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시커는 보기 흉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대체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