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커는 굳이 소리를 죽이려 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옷을 입었다.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아름의 고른 숨결은 자는 척하고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오늘도 제분소에서 길고 고된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신음 소리를 내며 손잡이를 밀었다. 벽에는 희미한 주황빛 얼룩이 남아 있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 얼룩에 주먹을 내리치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억눌렀다. 이를 악물고 계속 밀었다. 속에서는 뜨거운 분노가 끓어올랐다. 젠장. 왜 저 애는 모든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는 거지?
저 애? 아름은 대체 무슨 말을 했던 거지? 희미한 얼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마치 돌벽 위에서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한 번 내리치면 상처 나는 건 자기 손뿐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아름이 어떻게 생각할지조차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 셔츠를 흠뻑 적셨다. 하지만 노동은 가슴속을 갉아먹는 고통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했다. 빙글빙글. 이 모든 것이 다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정말 그걸 모르는 걸까?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분노는 무거운 통증으로 가라앉았다. 점심때 집에 가서 이야기를 해 볼까. 아니.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오히려 더 나빠질 뿐이었다.
“시커?” 문간에서 아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었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손잡이에서 손을 놓은 뒤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아름?”
“끔찍하네.” 그녀는 속삭이며 손가락으로 손잡이를 쓸었다. 그러고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점심 가져왔어.”
“그래.”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밖 벤치에 두고 가.”
아름은 발돋움해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같이 먹을 거야. 그리고 우리 얘기도 해야 해.”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밖의 벤치로 이끌었다. 둘은 나란히 앉았고, 그녀는 손수건을 펼쳐 빵 한 덩이와 이미 조금 뜯어 먹은 조각, 치즈 한 덩이, 올리브 몇 알, 토마토 하나를 꺼내 놓았다.
그녀는 가방에서 그의 접칼을 꺼내 토마토를 썰기 시작했다.
“그거 내 거야.” 그가 항의했다.
“이젠 내 거.” 그녀가 말했다.
식사를 마치자 그녀는 손가방에서 그의 파이프와 담배 주머니, 부싯돌을 꺼냈다.
“아름.”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담배 피울 거면 나랑 같이 펴.”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비밀은 싫어. 그게 전부야, 시커.”
그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손에서 파이프를 낚아챘다. 담배를 조금씩 집어 넣고 엄지로 단단히 눌러 다진 뒤 줄기를 입에 물었다. 부싯돌을 몇 번 쳐 불을 붙이고 천천히 연기를 들이마셨다. 잠시 머금고 있다가 몸을 돌려 그녀 반대편으로 내뿜었다.
모르고 봤다면 그녀가 그 모습에 푹 빠진 줄 알았을지도 몰랐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나도 해 볼래.”
그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고 파이프를 건넸다. “사발은 잡지 마, 아름. 손 데고 싶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파이프를 쥐고 아주 조금 빨아들였다가 곧바로 기침을 터뜨렸다. 콜록거리며 숨을 몰아쉬더니 파이프를 그에게 도로 밀어주었다. “역겨워. 정말 끊는 게 좋겠어.”
그는 파이프를 받아 천천히 한 모금 빨았다. 이번에는 몸을 돌리지도 않고 둘 사이로 연기를 내뿜었다.
아름은 손을 휙 저어 연기를 흩어 버렸다.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무슨 얘기?”
“당신 책은 책장이 필요해.”
“그래.”
“그리고 제대로 된 침대도, 식탁도.”
“알아, 아름.”
“오늘 사러 갈 거야. 당신 일 끝나면 바로. 안락이 어제 가게를 알려 줬어.”
시커는 파이프를 피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돈만 있었으면, 아름. 벌써 다 샀을 거야. 당신도 알잖아.”
그녀는 코를 찡긋했다. “안 사길 잘했어.” 두 사람 사이에는 **못생긴 소파**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맴돌았다.
“기다릴 수밖에 없어. 나한텐 돈이 없어, 아름.”
“잘 들어, 시커.”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이 열심히 일한 거 알아. 하지만 나도 일했어.”
“하지만, 아름…” 그가 망설였다. “그건 당신 돈이잖아.”
“그래, 시커.” 그녀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긴 내 집이기도 해.”

